생각하다

문득, 아니 항상 들었던 생각

대학 재학 시절, 나는 소위 말하는 '좋은 병원'에 취업하고 싶은 열망이 강했다. 나뿐만 아니라 대학 동기 모두의 소원이기도 했다. 우리 모두 뭔가에 홀린 것처럼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애초부터 간호직 공무원이나 공기업을 목표로 한 경우나, 미국으로 가는 경우를 제외하곤 말이다. 다들 왜 이리 좋은 병원에 가고 싶어 했는지 모르겠다. (당시에 생각했던 좋은 병원이 무엇인지는 뒤에서 언급하겠다.) 예상을 해보자면 복지가 좋을 것 같아서,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보다 많이 배우고 싶어서, 와 같은 일반적인 이유가 다반사였을 것이다.


나는 그들과는 많이 달랐다. 좋은 병원에 가면 뛰어나지 않은 내 학벌이 만회될 것이라는 생각이 가장 컸다. 학벌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 중에서 유명한 네임 벨류의 대학원에 재학하기 위해 애쓰는 경우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이걸 보고 몇몇 사람들은 '학벌 세탁'을 한다고 비난하는데, 나는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 사람들이 대단해 보인다. 그들의 고충이 내 입장과 비슷하기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자신 있게 대학 이름을 밝히 못하는 대학교를 다니는 것'에 대한 열등감이 강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새내기 때 설레는 마음으로 반 모임에 참석했는데, 택시 기사에게 '그 지역에서 꼴통 학교에 다닌다'며 면박당한 적이 있다. 자존심은 구겨지다 못해 타들어갔는데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어쨌든 이 학교의 재학생은 나니까. 고등학교 때 같이 잘 다녔던 친구도 서울 소재 대학교에 진학한 이후로는 학벌을 기준으로 나를 판단하고, 선을 긋기 시작했다. 믿었던 그 친구의 입에서 지잡대라는 말이 나올 줄이야. 허물없이 친하다고 생각했던지라 실망이 더 컸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학교 이름으로 손가락질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지만 뭐라고 할 수 없었던 상황은 여전했다. 내가 들었던 비하용어만 구구절절 적어도 몇 페이지는 나올 것이다.


또 다른 친구는 자유의지대로 시간표를 짜고, CC도 하고, 선배들과 어울려 동아리 활동도 하는 캠퍼스 라이프를 누리고 있었다. 내가 바라던 대학생활이 딱 그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와는 정 반대의 생활을 해왔다. 전문대 특성상 삼 년 만에 간호과의 모든 과정을 이수해야 했으므로 한 학기에 25학점을 들을 때도 있었다. 친구가 15학점 듣는다고 자랑하는데 그저 부럽기만 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데.. 사실 배가 조금은 아팠다..


해를 바라보며 강의실에 들어가 달을 보며 기숙사에 터덜터덜 들어가는, 내 일상이 없는 날이 허다했다. 어릴 적부터 환상을 품던 것과 백팔십도 달랐기에 '이 학교 때문에 내 인생이 꼬여간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었다. 내 대학 시절은 불행했다. 그 당시 내가 자주 듣는 곡은 Avril lavigne의 what the hell 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학교에 정시 2차 추가 합격할만한 성적을 거둔 사람도 나고, 대학 입학 며칠 전에 부랴부랴 이 학교를 선택한 것도 나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닌데 '엄마 아빠가 재수만 시켜줬어도.',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이 강제로 야자만 시키지 않았더라면 공부에 흥미를 잃을 리 없었을 텐데.'라는 투사를 하곤 했다. 그 와중에서도 '나는 겉모습보다는 실리를 따지겠다.', '그 누구도 내 직장으로 태클 걸지 못할 정도로 성공하겠다. 병원만큼은 촌구석을 벗어나고야 말겠다.'라고 생각하며 나는 사 년 동안 칼을 갈았다.


앞에서는 삼 년이라고 말해놓고는, 왜 거기서 사 년 동안 지냈냐고 의구심을 가질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말하겠다. 요즘 간호사들은 거의 다 사 년제 학사학위 졸업자다. 전문대라도 간호학과는 4년 제로 진행하는 추세다. 내가 학교에 다녔을 적에는 4년제 일원화의 시작단계여서 사 년 제로 진학할지 말지 선택할 수 있었는데 이왕 하는 김에 학사학위 달고 졸업하자는 생각에 진학을 선택했다.


취업에 성공하고 싶어서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 주로 암담한 내 현실을 위로해주는 자기계발서였다. 생생하게 꿈꾸면 행동으로 나타나고, 내 꿈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한 권 두권 빌려보던 것이 많아져서 매번 다독자상을 받을 정도가 됐다. 결국 도서관에서 일하시는 분도 내 이름을 외우셨다. 상을 받는 인증샷을 찍는데 도서관 담당 교수님도 "또 너야?"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시험기간에는 한숨도 자지 않고 공부했다. 사실 시험이 다가오면 간호학생 모두가 밤을 새운다. 그래서 밤을 새운다는 말이 생색내는 것 같아 부끄럽다. 타우린, 카페인과는 거리가 먼 나였는데 지난 몇 년간은 핫식스와 믹스커피를 달고 살았다. 커피만 마시면 심계항진이 오는데, 그것조차 즐거웠다. 최상위권은 아니었지만 상위권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성적에 목숨 걸고, 실습 컨퍼에 내 전부를 바쳤다. 다들 나보고 독종이라고 했었다. 오히려 그 말을 들으니 행복했다.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대학에서 sky가 있다고 하면 간호계에는 빅 파이브가 있다. 말 그대로 전국에서 가장 큰 병원 다섯 군데를 일컫는다. 나뿐만 아니라 간호학생들이 대학 시절 열망했던 좋은 병원의 기준이기도 하다. 서울대병원, 서울성모병원, 신촌 세브란스병원, 서울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이 이에 속한다. '좋은 병원'의 기준을 포괄적으로 잡자면 굳이 빅 파이브가 아니더라도 유명한 수도권/지방 대학병원, 국립암센터 등이 있다. 사실 이들 병원 같은 경우에는 자 대생이나 학벌 좋은 학교의 학생들이 많이 간다. 빅 파이브 같은 경우에는 내가 다녔던 학교에서는 전교 한 자리 등수 내에 들어야 갈까 말까 한다.


'아무렴 어떤가?목표는 높으면 좋지!'라는 생각에 빅 파이브를 목표로 잡았다. 꿈을 높게 잡으면 거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근접할 수는 있다는 책의 한 구절에서 용기를 얻었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날을 잡아 서울 삼성병원을 제외한 빅 파이브 병원에 전부 방문했다. 전국에서 손꼽히는 병원들이라 그런지 규모도 웅장했고, 내부 인테리어도 특급 호텔 같았다. 이 모습을 눈으로 보기에는 아쉬워서 사진을 찍어 보관하고 싶었다. 대리석 바닥에 갖가지 조형물이 너무나도 예뻤던 모 병원에서 병원 내부 사진을 찍다가 보안요원에게 제지를 당하기도 했다. 초상권이 있다나, 뭐라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병원 촬영을 할 때도 동의를 구하는데 내가 너무 개념 없는 짓을 한 것 같지만 영리적인 목적이 아니기에 그냥 넘어간 것 같다. 나중에는 아산병원에서 들고 온, 병원 전경이 그려진 팸플릿을 오려 성인 간호학 책에 붙여놓는 정성을 보이기도 했다. 내 꿈이 눈에 띄면 보다 더 노력할까 싶어서.


하지만 내 성적으로 빅 파이브는 넘사벽이라는 것을 대학교 4학년 1학기 때 서류에서 광탈(광속 탈락의 준말) 한 후에 깨달았다.


그래서 빅 파이브보다는 상대적으로 커트라인이 낮은 병원에 도전했다. 수도권 소재 대학병원, 광역시에 위치한 대학병원에 원서를 넣었다. 결과는 모 항공사 재단과 연관된 대학병원의 최종면접에서 떨어졌고, 수도권 소재 대학병원의 면접 전형에서 낙방했다. 결국 모 대기업과 연관된 대학병원에 최종 합격을 했고 지긋지긋한 취업과의 전쟁을 끝냈다.


아직도 기억난다. 합격하기 전날에 교수님께서 수업을 마치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일은 00 대학병원 합격 발표 날이죠?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최종에서 항상 떨어져서 자존감이 무너졌던 나는 '하,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데 떨어지겠지. 다른 병원에 원서나 낼까.' 체념했었는데 합격이 내 얘기가 될 줄이야. 나는 하루아침에 상황을 역전시켰다. 지긋지긋한 취준생 생활을 청산했고 주변 사람들의 시샘과 부러움을 샀다.


우선, 학교 플래카드에 내 이름이 걸렸다. 살면서 특출 나게 무언가를 잘해서 엄친딸이 되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상당히 낯설었다. 학교 이름으로 나를 판단하며 비아냥거렸던 사람들도 직장 이름으로는 한 마디도 태클을 걸지 못했다. 그들 입에서 대단하다는 말을 들을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중학교 때부터 줄곧 비교당했던 엄친딸 한 명이 있다. 초등학교 동창인데 친하지는 않았다. 그냥 어머니들끼리 같은 공장에서 일하기에 간간히 소식 정도는 들을 수 있었다. 그 애는 중학교 때 공부를 잘해서 외고 다음으로 커트라인이 높았던 모 여고에 입학했고, 거기서도 공부를 잘해서 법대 장학생으로 합격을 했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걔랑 공부로 비교를 엄청 당했다. 얘는 이런데 너는 왜 그러지 못하냐는 식의 비교 말이다. 그랬던 걔가 현재는 2년째 직업을 구하는 상태라고 한다. 내가 병원에 취업한 이후로, 엄마는 나에게 더 이상 친구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했다. 그 친구가 취업을 못해서 속이 시원하다는 게 아니라, 더 이상 누군가와 비교당하지 않아도 될 입장이 돼서 기뻤다. 엄마, 아빠에게도 '듣도 보도 못한 대학에 다니는 딸'에서 '대기업 다니는 딸'로 바뀌었다. 국시 기간에 트러블이 생겨서 연락을 끊었던 친척도 '대학병원 붙고 나서 나랑 인연 끊으려는 것 아니냐.'는 식의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한다. 다투게 된 계기가 국시 기간이라 그렇지 병원에 붙었다고 그런 건 아닌데.


주변의 태도가 달라지자 단단히 직장 뽕에 취했다. OT를 가고 나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다들 학창 시절에 열심히 공부하던 사람들이었고, 스펙을 들어보니 나는 거기에 운 좋게 들어간 케이스였듯 싶었다. 대기업 계열사라서 기업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을 보고, 거대한 계열사 공장을 둘러보며-지난 학교생활을 귀양 갔다고 비유하곤 했는데-귀양 간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따위의 명언이 내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곳에 당당히 입사한 나는 오로지 꽃길만 걸을 것이라며 단단히 착각했다.




3개월. 경력이라고 기술하지도 못할 기간이다. '직장생활에 못 버틴 루저'라고 비꼼 당하기에 딱 좋은 경우다. 다른 사람에 비해 얼마 겪지는 않았지만 나는 거기서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은 끝에 걸론을 내릴 수 있었다. 단언한다. 대학병원에 갔다고 해서 인생이 좋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내 급이 높아지는 게 아니다. 남들과 다르지 않다. 말단 사원이다. 내 가족, 내 친구, 내 친척은 겉으로 보이는-직장인 타이틀을 달게 된-나를 축하해줄 뿐이다. 냉혹한 사회는 일과 사회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절대로 환영하지 않는다. 다른 직장도 그러겠지만 간호사는 특히 갭이 크다. 실습을 다녀온 학생은 잘 알겠지만 학교에서 배웠던 것과 병원 생활은 괴리감이 굉장히 크다. 오죽하면 간호사 커뮤니티에서 "학교에서 '인계학개론', '일머리 간호'는 왜 안 가르치나요?" 같은 글이 올라올까. 글쓴이는 힘든 현실을 나름대로의 웃음으로 승화하고 싶어 센스 있는 글을 적은 듯싶은데 오히려 그게 더 슬프게 느껴진다.


'좋은 병원?' 절대로 아니다. '규모가 큰 병원', 즉 '큰 병원'으로 정정하겠다. 큰 병원일수록 환자의 중증도가 높고, 전문적인 처치가 많다. 또한 응급상황도 자주 터진다. 상대적으로 몸과 마음 모두 고생할 가능성이 크다. 조용한 카페(손님이 많은 곳은 바쁘겠지만) 같은 곳에서 일하는 그들은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동료에게 화를 낼 일이 없다. 혹은 혼자 일하기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할지도 모른다. 물론 손님이 전혀 없으면 매출에 불안함을 느끼겠지만, 그것은 예외로 하겠다. 반기는 인사가 서비스용 미소라는 것은 알지만 마음이 굉장히 넓어 보인다.


하지만 극한 곳에서 시간과 사람에 쫓겨가며 일하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을까? 전혀. 웃을 틈도 없다. 웃으면 여유 있나 봐?라고 비꼬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이건 내가 겪은 일이다. 한번 알려주면 한 번만에 철썩 깨닫기를 원하고 그렇지 못하면 인격모독을 당하기도 한다. 누구는 "이러려고 너희 엄마가 미역국 먹었냐?"라고 비아냥을 당했다고 하는데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중증도 높은 어느 병원은 간호사를 차트로 때리기로 유명하다. 내가 서합(서류합격) 했던 병원 중 하나인데, 면접에 떨어진 것이 신의 한 수 같았다. 알고 보니 내가 언급한 큰 병원들 중 하나에서는 공공연히 권고사직도 이루어진다고 한다. 다들 좋다고 생각한 병원들인데 말이다.


물론 태움은 간호계 자체의 문제다. 규모가 작은 병원에서도 태움이 있다. 하지만 큰 병원에서 그럴 가능성이 더 크다고 감히 단언한다. 큰 곳에서는 간호학적으로 배울 것이 많겠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습득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유리 멘틀을 강화유리 멘틀로 바꾸고, 필요하면 철로 방어해야 한다. 커뮤니티에서 군대도 버텼던 남자 간호사가 모 대학병원 수술실의 태움이 너무 심해 사직한 후기를 남겼다. 분위기가 좋다며 소문난 병원이라 더 놀라웠다. 저 예시 말고도 남자간호사들은 군대보다 간호사가 더 힘들다고 많이들 글을 남겼다. 결론이 뭐냐고? 큰 곳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환자/보호자, 모진 태움으로 인해 내가 죽겠다는 이유로 첫 번째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사 년 동안 한 공부가 헛된 것이라며 자괴감에 빠진 적이 있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한 목적은 오직 좋은 병원에 취업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 공부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고생하며 합격한 곳을 사직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지고 생활하면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는 인생무상이 될 수밖에 없다. 목표가 한순간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내 글을 보는 누군가는 그 마음 하나로만 공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찾지 못했지만, 이타적인 동기 하나쯤을 만들면 보다 의미 있는 학교생활을 보낼 것 같다. 그리고 큰 병원에 불합격했다고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임상은 생각보다 힘들다. 작은 규모의 병원에서도 적응하기 상당히 버겁다. 우선 내가 합격한 병원에 적응을 하고 나서, 그때도 큰 곳에 대한 미련이 있다면 경력직으로 도전해도 될 일이다.


혹은 나처럼 학교 이름에 대한 비아냥만 들으며 대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기서도 분명히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불행한 마음만 품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성적에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라면 교수님 추천을 받아 편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농촌이라서, 남들에게 꼴통 학교라고 비웃음 당해 싫다고 생각한 그곳에서도 얼마든지 자기계발을 할 수 있다. 특히 전문대는 취업 중심이기 때문에 학교 기준에 부합하는 자격증 조금만 따도 환급을 받을 수 있다. 나는 학교 생활 막바지에 그것을 알아 상당히 아쉬웠다. 학교가 싫다고 거리만 두지 말고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얼마든지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도서관에 책이 굉장히 많았고, 다양한 이벤트를 했었다. 학교생활을 마냥 불행하게 보냈다고 생각했었는데 생각해보니 극도의 좌절과 우울감에서도 휴학 없이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책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갓 스무 살 된 친구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학교 이름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가 있다면 인연을 끊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절친인데 어찌 그래요?" 그래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인성이 아니라 학벌 혹은 '내가 가진 것'이다. 80년을 더 살아가야 할 나의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부류다.


20살 때 세상은 승자와 패자, 둘로 갈라진다.
붙은 자와 떨어진 자. 이 두세 상은 모든 면에서 너무나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한쪽은 부모님의 축복과 새 옷, 대학생활이라는 낭만과 희망이 주어졌고, 다른 한쪽은 비로소 깨달은 세상의 무서움에 떨면서 길거리로 무작정 방출되어야 했다.

부모님의 보호도, 학생이라는 울타리도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철없던 청소년기의 몇 년이 가져다주는 결과치 고는 잔인할 정도로 엄청난 차이였다.

나는 비로소 내가 겨우 건너온 다리가 얼마나 무서운 다리였는지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이후론 승자 팀에 속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그 사실을 즐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정말 나의 20살은 이렇게 승리의 축제로 뒤덮였고, 나는 내 장래를 위한 어떠한 구상, 노력도 하지 않았다. 나의 20살은 이렇게 친구, 선배, 여자, 술, 춤으로 가득 찼다. 나는 세상이 둘로 갈라졌으며 나는 승자팀에 속해 있었기에 이제 아무 걱정 없이 살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7년 후 나는 놀라운 사실들을 또 목격하게 되었다. 영원할 것만 같던 두 개의 세상이 엎치락뒤치락 뒤바뀌며 그 2 세상이 다시 4 세상으로 8 세상으로 또 나누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학에 떨어져 방황하던 그 친구가 그 방황을 내용으로 책을 써 베스트셀러가 되는가 하면,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취직했던 친구가 구조조정으로 실업자가 되기도 하고, 춤을 추다 대학에 떨어진 친구가 최고의 안무가가 되기도 하며 대학에 못 가서 식당을 차렸던 친구는 그 식당이 번창해서 거부가 되기도 했다.

20살에 보았던 영원할 것만 같던 그 두 세상은 어느 순간엔가 아무런 의미도 영향력도 없는 듯했다.

20살,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20살 전에 세상이 계속 하나 일 줄 알고 노력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좌절했듯이, 20살에 보았던 그 두 가지 세상이 전부일 거라고 믿었던 사람 또한 10년도 안되어 아래 세상으로 추락하고 마는 것이다.

반면 그 두 가지 세상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과 꿈을 가지고 끝없이 노력했던 사람은
그 두 개의 세상의 경계선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었다.

지금 20살 여러분들은 모두 합격자, 아니면 불합격자의 두 세상 중 하나에 속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승자는 자만하지 말 것이며,
패자는 절망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살에 세상이 둘로 달라지는 것으로 깨달았다면, 7~8년 후에는 그게 다시 뒤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20살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말고 일찍 출발한다고 반드시 이기는 것이 아니며 늦게 출발한다고 반드시 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JYP 대표 박진영의 명언이다. 이 글을 읽고 깨달은 바가 상당히 많았다. 대학 다닐 적에 학교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것이 부끄러웠다. 외향적인 것으로 나 자신을 깎아내렸던 지난날 역시 후회스러웠다.




내가 바랐던 간호학과 생활은 이게 아니라 힘든가? 혹은 나처럼 학교가 촌이라서 상당히 불만스러운가?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가고, 대학생활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다. 그 와중에 힘들다고 자신을 내팽개쳐서는 안 된다. 내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고심 끝에 이것이 정 내 길이 아니다 싶으면 plan A, plan B를 만들어서 과감히 길을 돌려야 한다.


내가 생각한 대학병원은 이게 아니라 힘든가? 네티즌 누구의 말대로 석유재벌이 아닌 이상 직장을 때려치우기란 상당한 패기를 가지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애초부터 대학병원에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정 힘들다면 건설적인 방법으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술, 담배는 나를 좀먹는 방법이다. 자신을 해하는 방법보다는 이득이 되는 방법을 취해야 한다. 취미를 만들 여유가 없다면 책 한 권이라도 읽으면 머리가 정리될 것이다. 인격모독과 폭행은 없어야 한다. 있는 직장이 비정상이다. 노오력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수많은 경쟁률을 뚫고 대학병원에 들어간 당신은 충분히 노력한 사람이다. 하지만 폭행이 이루어지는 직장이라면, 수간호사에게 이 사실을 말해도 내 말에 귀담아듣지 않아주는 경우라면 그만둘 것을 추천하고 싶다. 어쩔 수 없다. 내 정신을 붙들고 있는 게 중요하지.


결론은 명문대에 갔다고, 큰 병원에 갔다고 무조건 성공한 인생은 아니다. 내 목적이 오직 명문대, 오직 큰 병원이라면 대학을 그만두거나 큰 병원을 그만뒀을 때의 좌절감이 매우 크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느냐? 와 같은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교수님께서 무조건 큰 병원이 좋다고 했어요, 큰 병원 가면 친구들한테 자랑할 수 있어요 같은 것은 외부적인 요인이다. 나를 위해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혹은 큰 병원에 가지 못했다고 실망하는 사람도 많다. 그곳에 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내 직장에서도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생활해야 한다.


박진영 대표의 명언은 스무 살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인생길을 걸어가는 모두에게 해당된다. 내가 길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좋은, 나쁜 갈림길이 나타날 수 있다.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은 오로지 내가 하는 일이다.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 주지 않는다. 내가 흙수저라서, 지잡대라서 등등의 핑계는 그 누구에게도 통하지 않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사회는 내 상황을 배려해주지 않는다.


<Life is not fair; get used to it.> 삶은 공평하지 않기에 익숙해지라는 빌 게이츠의 명언이다.


비선 실세 최순실의 조카 장시호가 내 나이였을 때 한 달 용돈이 2000만 원을 받았다는 기사를 봤다. 처음에는 굉장히 부러웠다. 내 월급을 일 년 동안 안 쓰고 모아도 저만큼 나올까?라는 생각부터 먼저 했다. 하지만 그 돈은 정당하게 가진 돈이 아니지 않은가? 저 사람보다 물질적으로 한참 부족하지만 도덕적인 결함 없이 정당하게 사는 내 인생이 오히려 도덕적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런 마음을 접었다.


인생은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 누구 집은 부자인데, 부모님이 가게 차려줬는데, 우리 집은? 이라며 끊임없이 비교할 필요 없다. 나만 손해다. 환경이 어떻든 간에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멋진 인생이다. 그것이 내가 항상 들었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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