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순간에서 최고를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하는, 간호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

어린 시절-대략 네 살 즈음-아버지께서 퇴근길에 조그마한 하얀 상자를 들고 오신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구급함. '구급함'이라는 단어가 한글로 적혀 있었지만 읽을 줄만 알았지 무슨 뜻인 지는 알고 싶지 않을 정도로 천진난만하게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갈색 약(포타딘)을 열어보고 시큼한 냄새를 킁킁 맡아보기도 하고, 거즈를 만져 까끌까끌한 촉감을 느껴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도구가 사람을 치료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쯤은 인지하고 있었고, 나에게 있어 그 역할이 굉장히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아직도 있다, 구급함. 에탄올의 유효기간은 2000년..

sticker sticker


아홉 살, 저녁 어느 날. 평소처럼 쓰레기를 버리고 집에 돌아오던 길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나를 업고서는 '이게 너를 업어주는 마지막 날이야. 이제 다시는 너를 업어주지 못할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어린 마음에 아닐 거라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며칠 후, 나는 입원 치료를 하러 간 엄마를 등지고 반년 간 먼 친척 댁과 큰 외숙모 댁을 전전해가며 지냈다. 반년이 지난 후 퇴원한 나의 어머니는 다시는 날 업지 못하셨다.


큰 외숙모 댁에서 학교를 다니며 새로운 하루하루에 적응해 갈 즈음-그 날이 가을과 겨울 사이 어느 날이었는데-같은 반 친구 S가 인사를 걸어왔다. "현아 안녕?" 나도 인사를 했다. "응, 안녕." 옆에 같이 있던 외사촌 오빠가 "쟤 누구야?"라고 물어왔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응, S, 같은 반 친구."라고 말했다. 그게 S와의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이야. 아이는 오락게임을 끝낸 후 문구점을 나가려던 찰나에 전깃줄에 발이 걸려 큰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살지 못하였다. 책상 위에 국화꽃이 놓였고 담임선생님과 반 친구들은 하루 종일 그 아이 영상을 돌려보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동해바다를 좋아했던 그 친구는 화장되어 바다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 사건 이후 담임선생님은 바뀌었고, 내가 키웠던 히야신스는 아이의 슬픔을 공감하던 것일까, 하얀 꽃을 만개했다. 그리고는 서서히 S는 내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중학교 삼 학년, 윤하의 비밀번호 486을 들으며 한창 사춘기의 감정에 잠겨 있을 무렵, 쉬는 시간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큰 외숙모께서 교통사고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는 것이다. 지병 하나 없던 건강한 분이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어있었다. 이질적인 감정에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머리는 깎여진 상태로 수술 자국이 선명하게 남겨져 있었다. 마디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어 있던 손을 얼러만 지며 울고 또 울었다. 시험공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기적이 일어나서 외숙모가 깨어나기만을 바랐다. 믿지도 않는 하나님 부처님 마호메트 님에게 끊임없이 기도를 했다. 하지만 기적, 그런 일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고등학교 삼 학년,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친할머니는 잘못 조제한 약을 드시고는 삼 년간 중환자실에 계시다 하늘로 가셨다고 한다. 살면서 한 번도 뵙지 못한 우리 할머니께서 그렇게 돌아가셨다니. 말로만 듣던 의료사고가 바로 내 얘기였다니. 매우 충격적이었다.



겉으로는 어영부영 이끌려서 간호학과에 진학한 듯 보였다. 사촌언니는 간호사, 외사촌 언니는 임상병리사, 외사촌 오빠 역시 간호학과 학생이어서 자연스레 보건계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대학을 나와도 취업을 못하는 이 현실에, 간호학과가 취업도 잘 된다고 하기에 솔깃했다. 따라서 반에서 열댓 명은 간호학과를 선택할 정도로 붐이었다. 게다가 간호학과는 지방 전문대를 다니더라도 "오, 간호학과~"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주저 없이 선택한 듯싶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나의 그릇된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당신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다칠 수 있는 상황을 염려하여 구급함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내가 구급함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아픈 사람을 치유시키는 것에 관심을 가졌던 나의 천성 때문이었다.


나를 다시는 업어주지 못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그리도 슬피 들렸던 이유는 바로 유방암 진단 때문이라는 것을 성인이 다 돼서야 알게 되었다. 본래 유방 절제 부위로는 arm save(해당 팔로 혈압을 측정하거나 정맥주사를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 해야 한다. 수술 부위의 팔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재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불편한 팔로 지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무거운 아이를 업어주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인 것을.. 그렇게 아팠으면서 자식들에게 티 내지 않으려는 우리 엄마 같은 환자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 역시 누군가의 어머니를 돌본다는 마음으로 간호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고, 해당 내용을 자기소개서에 기재하기도 했다.


환자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나의 친구, 가끔은 엄마보다 더 엄마 같았던 소중했던 내 외숙모도 될 수 있다. 즉, 환자는 누군가의 사랑하는 사람이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이러한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내 인생이 나아가야 할 방향-선천적으로 돌봄을 좋아했던 성격-과 일치했다.


하지만 따뜻한 마음만으로 환자를 돌보는 것은 큰 오산이다. 의료사고로 돌아가신 우리 친할머니 같은 분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가장 최전선에서 환자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간호사의 정확한 수행력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우리 할머니 같은 사람이 없도록 확인, 또 확인하는 간호사가 되어야지 마음먹었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간호학과에 진학해야겠다고 느꼈으며 '너는 간호학과에 진학하지 못할 것이다'는 담임선생님의 냉정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진학에 도전했었다.



이 글을 제일 처음에 발행하고 싶었는데, 브런치 사용 미숙으로 인해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 글을 올리게 됐어요. 제가 브런치 작가에 도전하기 위해 제일 처음 쓴 글이에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최악의 순간에서 최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