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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간 드는 생각

그저 얼떨떨하다. 이게 실화인가?


수험 판이 몰카 프로그램 같다. 인형극 배우가 줄을 이용하여 인형의 움직임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종하는 것처럼, 이 판도 어느 신적 존재가 공시생들을 투명 줄로 이리저리 조종하는 느낌이 든다.


분명한 건 2020, 2021 시험은ㅡ내 주변 사람들 경우ㅡ나 빼고 다들 잘 쳤다. 현실에서도 인터넷에서도 다들 점수 자랑하기 바빴으며, 커트라인이 하늘을 치솟았다. 단기 합격생이 우르르 나왔다. 특히 첫 번째 시험에서 말이다.


그들과 반대로 이 년 연속 나의 소단기 풀서비스 점수는 곤두박질쳤다. 동시에 내 마음도 순식간에 폭락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르바이트로 인한 피로와 임금 체불 소송까지 진행 중이라 정신적인 고통이 상당했다.


가장 힘든 건, 그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고 그 누구도 확실히 알려주지 않는 내 미래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수없이 넘어져서 생채기가 났다. 그 꼴이 우습다고 수많은 사람이 날 손가락질했다. 무모한 짓 이제는 그만하라고 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 둘 나를 떠나갔다. 게임 캐릭터 지우듯 인생을 지우고 싶었던 나의 지난 나날들.


그런데 이번 시험은 뭔가 달랐다.

"왜 내가 필기를 붙었지?"

"나 같은 애가 필기를 붙어?"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분명 생활영어 1번 문제부터 막혔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이걸 엄마한테 어떻게 변명한담? 아, 삼 년 공부 물 건너갔네.'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아냐. 이래서는 안 된다. 강사님이 알려주신 대로 풀자. 분명히 단서가 있을 거야.' 그런 식으로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서 1~4번 빈칸 문제는 다 맞히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다른 문제들을 틀려서 문제였지만.


소방학개론에서 나온 낯선 문제들은 조금 끄적이다가 넘겼다. 이건 내 머리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러다가 다른 문제까지 지장을 줄 것 같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른 문제부터 처리한 후에 해결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런 문제가 퐁당퐁당 나왔다. 나름대로의 감에 의존해서 풀었지만 문제집처럼 실시간으로 답을 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찝찝함을 안고 문제를 풀어가는데 그 유명한 황 문제가 나왔다. 이것 역시 내 머리로 도저히 풀 수 없어서 넘겼다.


뒷장에 인화점 발화점 어쩌고 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익숙했긴 하지만 막상 보니 정신이 없어서 아무렇게나 풀었는데, 더 가까운 정답이 있는 듯하여 답을 바꿨더니 내 선택이 맞았다.


그리고 맞닥뜨린 킬러 문제. ㄱㄴㄷㄹ 선택 문제였는데 ㄹ 선지 하나로 답이 갈렸다. 하지만 나는 ㄹ선지를 본 적이 없는데? 나름 문제를 많이 풀었다고 자부했는지라 적잖이 당황했다. 찍는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내 머리로 풀 수 없는 문제 두 개와, ㄹ을 포함하여 찍은 한 문제 이렇게 틀렸다. 작년 재작년 기준으로는 이래서는 안 되는 점수였는데 올해는 이게 나름 잘 친 계열에 들어가다니. 참 이상도 하다.


여하튼 이런 상황도 모른 채, 집으로 돌아가는 엄마 차 안에서 실시간으로 가채점을 했다. 작년과 점수가 비슷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적어도 시험 결과로 가족들 앞에서 운 적은 없었다. 공부하다 서러워서 눈물 흘린 적은 있어도..


몰래 눈물을 훔쳐 닦고 이성적인 목소리로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일주일만 마음 가다듬고 다시 병원에 취업하겠다고 의사를 전했다. 나는 요양병원에 다니면서 계속 간호사를 하든, 아니면 시험에 미련이 생기면 직장 병행하며 수험 준비를 하든 결론을 지어볼 계획이었다.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다시 시험 준비를 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이대로는 접을 수 없다고, 병원에 다니면서 붙을 때까지 공부를 계속해보자 하셨다.


그런데 작년에 비해 커트라인이 삼십 점 떨어진 걸 몰랐지 뭐야. 캬캬컄.^^


어쨌든 가채점 이후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분위기가 나에게 유리한 것 같아서(?) 부랴부랴 운동을 했고, 십 킬로 찐 살을 감량하기 시작했다.


아참. 중간에 소방학개론 한 문제가 전원 정답처리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나는 그 문제를 맞혔었던 지라 나에게 굉장히 불리했다. 그래도 필기 합격에는 지장을 주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시험 당일에는 파울을 받을까 봐 긴장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59점을 받았다. 면접도 숙지 찬스를 많이 썼는데도 어쨌든 운이 좋아 최종 합격을 했다.


사실 영어 점수가 안 좋아서 원래 같았으면 필기 합격은 택도 없었을 건데. 소방학개론이 그런 식으로 나와서 나를 살렸다. 그리고 올해 유독 체력을 일찍 쳤다. 그나마 체력 학원을 미리 다녀놨던 지라 나에게 유리했다. 하지만 평소에 운동을 전혀 한 적이 없었던 사람은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나를 위해 판이 돌아갔다.


이런 알쏭달쏭한 일이 나에게 일어나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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