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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민 Oct 20. 2021

대중 앞에서 얼굴이 빨개지던 아이

대중 연설 공포를 넘어 ‘세심한’ 통역사로 인정받기까지

"나 옛날에 사람들 앞에서 발표도 잘 못하고, 얼굴 막 빨개지고 그랬는데."

"언니가요? 안 믿겨요."


얼마 전, 아는 동생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제야 생각났다.

‘아 맞다. 나 원래 수줍음 많고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거 싫어했지.’


지금은 주변 지인들에게 말해도 대부분 잘 믿지 않지만, 한때 나는 대중 앞에서 말하는 걸 극도로 두려워했다.

내가 예전엔 그랬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으니, 참 많이 발전했다.


문득 내 어린 시절을 되돌아봤다.

어릴 땐 유독 부끄럼 잘 타고 혼자 놀거나 책 읽기 좋아하는 내성적인 아이였지만, 자라면서 외향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사회에서 여러 면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하게 되었.

그래서 어딜 가든 씩씩하고 털털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포장했고, 이젠 그렇게 행동하는 게 편하고 익숙해졌다. 원래 이게 내 성격인가, 헷갈리기까지 한다.

덕분에 요즘은 붙임성 있다, 친화력 좋다는 말도 종종 듣는다.


어릴 적 그토록 부끄럼쟁이던 나는 어디 가고(지금도 누군가는 내가 부끄럼쟁이인 걸 꿰뚫어보겠지만, 예전에 비하면 티가 덜 난다고 믿는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말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통역사가 되었다.


대개는 화자와 인터뷰어와 나, 이렇게 소수의 인원만이 참가하는 인터뷰 통역을 하지만, 때론 다수의 사람들상대로 통역한다.

물론, 혼자만의 시간에 차분히 집중할 수 있는, 글로 작업하는 번역이 다수를 대상으로 말하는 통역보다 적성에는 더 잘 맞는다.

하지만 때론 먹고살아야 해서, 때로는 세상으로부터 차단된 번역 일에 물리기도 해서, 적성과는 상관없이 날 찾아오는 통역일을 덥석 덥석 받는다. 그런데 예상외로 좋은 성과를 내기도 해서, 함께 일해본 클라인언트들은 몇 년째 내게 통역을 의뢰하고 있다.


통역일을 의뢰받으면, 나는 얼굴에 가면을 쓰고 긴장되고 떨리는 속마음을 철저히 감춘다.

자꾸 겉으로 괜찮은 척했더니, 이제는 다소 익숙해져서 진짜 떨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한때는 외향성을 타고난 사람들만이 통역사가 될 수 있는 건 아닐까란 생각도 잠시 했었다.

특히, 대학원에 재학하던 시절. 하나를 깊이 있게 파는 걸 좋아하는 내게 ‘양적으로도’ 많은 분량의 공부와 퍼포먼스를 요구하는 대학원 수업은 내게는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았다.

매일매일 수업에서 다수의 대중(대학원 동기들) 앞에서 통역을 하고 그에 대한 혹독한 크리틱(주로 못한 점, 개선할 점)을 받는 하루하루는 몹시 지쳤다.

하루는 교수님이 ‘지민 씨는 꿈이 뭐예요?’라고 물으시길래 ‘프리랜서 통번역사가 되는 거요.’라고 말했더니

영어도 잘하고 말도 잘하고 다 좋은데 한 가지, ‘카리스마’가 없다는 진단을 받다.




내가 '말하기 훈련'을 처음 받은 건 아마도 대학교 입시를 준비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입시 때 영어 특기자 특별 전형인 국제학부에 지원했는데, 50% 영어 논술, 50% 영어 인터뷰로 선발되는 학과였다.

처음 내가 국제학부에 지원한다고 했을 때, 입시 학원 원장님은 말렸다.

국제학부에 지원하려면 '말빨 하나는 끝내줘야 한다'고. 어떤 주제를 던져도 유창하게 술술 영어로 말 잘하는 애들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하셨다.

그 말에, 옆에 있던 미국 교포 선생님이 내 편을 들어주셨다. "글을 잘 써서 도전해 볼 만해요."

아마 '말은 잘 못하지만'이란 내용이 앞에 생략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대학원 입시 준비를 위해, 나의 '말하기 훈련'이 시작되었다.

"자, 먼저 자기소개를 해보세요."

면접의 가장 기본,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었다.

친구들을 청중 삼아, 학원 교실 앞에 나가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나에 대한 소개를 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전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게 너무 부끄러워서 귀부터 빨개졌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에 집중하기보다, 얼굴과 귀가 뜨겁게 달아오른단 느낌에 집중하느라 횡설수설하던 기억이 난다.

얼굴이 살짝 뜨거워질 때와 터질듯이 활활 타오를 때를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빨개지는 내 얼굴은 얼마나 못나 보일지, 사람들은 그걸 보고 뭐라고 생각할지, 그들의 얼굴을 차마 쳐다볼 자신이 없었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같이 면접을 준비하던 한 언니는 '어머, 지민이 얼굴 빨개지는 것 좀 봐, 귀여워.'라고 했지만

나는 결코 귀엽고 싶은 마음이 1도 없었다.


얼굴 빨개지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뜨겁게 타오르는 내 얼굴이 느껴졌다.

'분홍색 코끼리를 절대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더 생각나는 이치랄까.


하루는, 친구가 내 생각이 났다면서 책 한 권을 건네줬다.

제목은 <얼굴 빨개지는 아이>.


생각 많은 내가 고민 끝에 떠올린 수법은, 다른 일에 집중력을 쏟는 것.

얼굴이 빨개지든 말든, 뭐 남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얼굴이 빨개지려고 하면 목소리를 더 키워보는 게 어떨까. 적어도, 목소리를 키우면 저 애 참 애쓰고 있나 보다, 그 노력이 갸륵해서라도 점수를 더 주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나는 얼굴이 조금이라도 빨개질 것 같은 순간, 목소리를 키워갔다.

원래 목소리가 좀 작은 편이기도 했어서 그렇게 목소리를 더 크게 내는 것이 듣기에도 좋았을 것이다.

사람의 에너지와 집중력은 한정되어있다. 목소리를 키워야지 했더니 얼굴과 귀로 혈액이 쏠리는 느낌에 그나마 덜 집중하게 되었다.


대학 입학 이후, 성인이 되고 나서도 나는 대중 앞에서 발표할 일이 종종 있었다.

입시 인터뷰 준비를 하면서 나만의 얼굴이 빨개지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하나둘씩 나만의 비법을 만들어나갔다.

그중 하나는 '내용을 통째로 외워버리는 것'.

이 방법 또한 첫 번째 방법처럼 집중력을 분산시켜 얼굴이 빨개지지 않도록 해주었다.

외운 내용을 머릿속에서 다시 끄집어내는 데 에너지를 쏟다 보니, 부끄럽다거나 떨린다거나 하는 생각을 덜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비법은 애초에 청중에게 '나 지금 떨린다'고 인정하는 것.

예를 들어, 대중에게, "와, 이렇게 많은 분들을 앞에 두고 발표하려니 생각보다 떨리네요.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많은 대중이 참석했다는 것을 은근슬쩍 강조하고 나서, 나 떨려요, 그래도 잘 봐주세요, 하는 식으로 혹여나 내가 진짜 떤다 해도 밉상으로 봐주지 마세요, 라는 식으로 청중에게 어필했다.


내 나름대로 말하기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구해서인지, 어느새 나는 사람들 앞에서 당차게, 발표를 제법 잘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웬만한 취업 면접에 척척 잘도 붙었다.

언제부턴가는 같이 면접 보는 지원자로부터 '말 잘하시네요'. '면접 질문이 너무 (당신에게만) 쏠렸어요'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


물론, 통역은 말하기와는 또 달랐다.

하지만, 결국 어릴 적부터 말하기를 고민하고 머릿속에 미리 할 말을 정리해서 말하는 법을 연습한 경험들이 분명 통역에도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통역을 할 때, 나는 여전히 카리스마가 없다. 타고난 연설가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 일하며 내가 느낀 건, 내성적이지만 노력으로 말을 잘하게 된 나는 '내성적인 화자'의 마음까지 잘 헤아릴 수 있다. 그리고 그게 내  나름의 경쟁력이 되었다.

일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중 내성적인/내향적인 화자들은 처음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차차 나를 동류로 여기며 편하게 생각한다.

차분한 통역사 덕분에 덜 긴장하고 인터뷰했다고 내게 고마움을 표한 화자도 있었다.

아마 내가 그들의 떨리는 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나는 ‘세심한 통역사’ ‘친절한 통역사’로 평가받는다.


여전히 타고난 대중 연설가들, 자신감 넘치고 카리스마 있는 통역사들이 부럽긴 하다.

하지만 비록 타고나게 말 잘하진 못해도, 나는 앞으로 계속해서 나만의 치열한 방식으로 준비해 세심하게 화자를 배려하며 통역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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