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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민 Jul 11. 2020

어쩌다 보니 N잡러

N잡러로 산다는 건

요즘 핫한 키워드 중 하나, N잡러.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트렌드에 민감한 편이긴 하지만, 사실 난 애초에 N잡러가 되야겠다고 마음먹고 N잡러가 된 건 아니다.

그저 ‘회사 일’이 아닌 ‘내 일’을 하고 싶어서 다니던 회사를 퇴사했고, 대학원에 진학해 졸업과 동시에 프리랜서로 일하게 된 것뿐. 본업인 통번역 외 주변에서 들어오는 이런저런 일거리(알바거리)들을 마다하지 않고 감사히 받으며 하루하루를 보내왔더니 어느덧 내가 바로 그 ‘N잡러’가 되어있는 게 아닌가.


과거에는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 이런 영어 속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Jack of all trades, master of none.

여러 가지 일을 다 하려다가 결국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잭......

비슷한 맥락을 가진 한국 속담으로는 '한 우물을 파라'가 있다.

사실상 현실에서 '팔방미인'이 되기란 불가능한 것 같다.


그간 나는 이런 류의 속담과 여러 가지 직업을 갖는 것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이 내심 두려웠다.

너무 욕심부려서 이런저런 일을 벌이다가 결국 뭐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건 아닌지......


그런데 요즘은 오히려 한 우물을 파기보다는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더 큰 힘을 받고 있는 것 같다.

꿈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책 <모든 것이 되는 법>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기도 하고 말이다. 

내 입장으로서는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서론이 좀 길었는데. ^^;

지금부터는 N잡러로 먹고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N잡러로 살면서 내가 좋다고 생각한 몇 가지에 대해 적어보겠다.


1. N잡으로 극복한 코로나

나의 본업은 통번역이다.

언젠가 나 스스로를 통·번역사라고 소개하자, 누군가 “통번역사는 뭔가요? 통으로 번역하는 사람인가요?”하고 물은 적이 있다. ㅎ_ㅎ

통역과 번역을 합쳐 ‘통·번역’이라 하고, 이를 업으로 삼는 사람을 통번역사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사실상 두 업무는 성격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실제 통번역 시장에는 '통·번역사'보다는 통역 또는 번역 중 한 가지만 하는 '통역사'나 '번역가'가 더 많은 것 같다.

어찌 보면, 애초에 이 두 가지 일을 모두 하겠다고 결심한 나는 이미 N잡러가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본업인 통·번역 외에도 상황에 따라 영어 홍보물 제작, 영문 서류 감수, 영어 강의, 영어 기사 검색 및 요약 등의 일도 한다. 한때는 기업의 수출팀이 해외에 상품을 잘 팔 수 있도록 피칭을 도와준 적도 있고(과거 회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으로 나는 코로나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본 프리랜서이다.

기존에 정기적으로 진행하던 영어 강의나 직접 현장에서 대면으로 이뤄지는 통역일은 거의 못하고 있다.

내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게 이 두 가지였으니, 금전적으로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그간 내가 N잡러로 다양한 일을 해온 덕분에 '비대면'으로 가능한 크고 작은 일들이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작품 번역, 영어 홍보글 작성, 홈페이지 번역, 유튜브 자막 번역, 영어 기사 검색 및 요약 등.

통역과 강의를 하지 못해 늘어난 시간이 점차 이런 일들로 채우지고 있다.

N 잡러인 게 참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2. 다양한 일을 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N잡러로 일하면서 자주 드는 고민은 '여러 가지 일을 하느라 뭐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게 아닌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프리랜서로 다양한 일을 하면서 느낀 건,

오히려 한 가지 일만 하는 것보다 N잡을 갖는 것이 좋은 점도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체육, 미술 이 모든 과목을 동시에 배웠다.

아마 어릴 적 그렇게 다양한 내용을 공부해야 했던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만일 어느 한 과목만을 공부했다면, 본인이 어떤 분야에 뛰어난 지 경험을 통해 알아가지 못했을 것이고,

또 그 한 가지에 너무 쉽게 질려버리지 않았을까.


N잡을 갖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면 제각각 나름의 재미가 있기도 하고, 내가 어떤 일을 잘하는지, 나의 강점은 무엇인지도 조금씩 파악할 수 있다.

한 가지 일만 하면 보지 못할 부분을 볼 수 있을 때도 있다.

한 가지 일만 했다면 떠올리지 못했을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때로는 서로 다른 일 사이에서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를테면, 내가 번역을 하면서 영어 홍보물 제작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나는 문학작품을 번역하면서 마주한 참신한 표현들을 수첩에 적거나 기억해두었다가 영어 홍보물 제작 시에 활용하기도 한다.


통·번역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아니라면, 언뜻 보기에 이 두 가지는 비슷한 업무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은 이 두 업무의 성격은 상당히 다르다.

번역은 원문의 내용을 고스란히 살려서 옮겨야 한다는 점에서 번역가가 발휘할 수 있는 '창의적 재량'은 다소 제한적인 반면, 영어 홍보물 작업은 상당 부분이 '창작' 업무이다. 홍보물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매력적인 문구에 대한 고민이 많이 필요하다. 글을 어떻게 구성할지도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또한, 나는 한 행사에서 통역과 번역 두 가지 업무를 모두 담당해서 클라이언트로부터 좋은 피드백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당시 내가 번역한 내용에 대해 연사와 관객이 대화하는 통역을 맡았는데,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미 내용을 충분히 잘 숙지하고 있었던 덕분에 내용을 보다 잘 이해한 상태로 통역에 임할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시너지 효과가 아닐까.


3. '매너리즘'이 뭔가요

뿐만 아니라, N잡러는 똑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하는데서 오는 매너리즘을 (비교적) 피할 수 있다.


대개 직장에서 한 가지 업무만을 맡아서 하다 보면, 처음에는 재미있던 일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적으로 계속하다 보면 시간이 갈수록 지치거나 흥미를 잃기 쉽다.

다양한 일을 하면, 한 가지 일만 주구장창 했을 때 겪게 되는 매너리즘을 극복할 수 있다.


나는 평소에 어떤 일을 하다가 그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업무 분위기를 바꿔서 다른 일을 한다.

이를테면, 홍보물 제작을 하다가 창의력이 잘 발휘되지 않으면, 계속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며 시간만 낭비하기보다는 다른 일을 한다. 영어 강의 자료를 만든다든지, 번역을 맡은 텍스트 속 특정 내용에 대해 배경 조사를 한다든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창의력 없이 쉽게 끝낼 수 있는 일들을 한다.


물론, N잡로러 지내다 보면 한 가지 일이 아닌 여러 가지 일을 하는 데서 오는 어려움도 많다.

동시에 여러 가지를 처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벅찰 때도 있다.

번역 프로젝트 마감을 하고 나서 쉬지도 못하고 통역 행사를 위해 공부해야 할 때도 있고.

한 가지 일이 조금 적응되는가 싶으면 또 새로운 일을 맡아 다시 처음부터 삽질하며(?) 차근차근 배우고 익숙해지기까지 많은 체력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한 가지 일만 집중적으로 파는 것에 비해 실력이 빠르게 쑥쑥 늘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질 때도 있다. 수시로 바뀌는 일정 때문에 늘 정신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까지는) N잡,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의 힘을 믿는다. N잡만의 몇 가지 장점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고 누군가가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일단은 다 해보라"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제 우린 한 가지만 잘해서 먹고사는 시대를 넘어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도 잘 살 수 있는 그런 다채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한 가지만 잘하는 사람이 아닌, 한 가지를 잘하기 때문에 덩달아 다른 것들도 잘하는

그런 멋진 N잡러가 되어보자. (저도 꼭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요. =_=;; 제발~~)



Jasmine (문화예술 통·번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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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메일: jeeminjl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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