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밴드 하나만 주시면 안 돼요?"
따스한 봄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2시, 크게 한 번 심호흡을 내쉰다. 오늘의 첫 수업은 말도, 웃음도, 눈물도 많은 3학년 여자아이들로만 이루어진 '삐약이 반'수업이다.
이 반 아이들이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때면 마치 노란 병아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삐약삐약'거리는 모습이 떠올라서 나 혼자 부르는 애칭이다.
셋, 둘, 하나,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서로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선생님, 오늘 학교에서 단원 평가를 봤는데 1개 틀렸어요, 아는 문제인데..."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근데 금요일은 학원 못 올 것 같아요. 친구 생일파티에 초대받아서 가야 하거든요.. “
"선생님, 어제 놀이터에서...."
"어서들 와! 오늘은 세 명이 같이 들어오네? 자, 자리에 앉아서 수업 준비하면서 한 사람씩 천천히 얘기해 보자!"
15분 남짓 수업이 진행됐을 때, 오늘도 어김없이 B가 부른다.
"선생님, 저 밴드 하나만 주시면 안 돼요?"
"B야, 어디 다쳤어?"
"손에 상처가 나서요."
"그래? 연고는 안 발라도 되는지 선생님이 좀 볼게."
'으응? 어디를 다쳤다는 거지? 역시 이번에도..'
"B야 어디를 다쳤는지 선생님은 잘 안 보이는데.. 우선 밴드 가지고 올게."
"여기요. 따가워서 붙여야 해요."
"에구, 따가웠겠구나. 그럼 밴드만 붙이고 다시 공부하자."
돋보기를 가져다 봐야 겨우 보일 것 같은 아주 미세한 자국도 이 아이에게는 아프고 신경 쓰이는 상처이다. 바로 처치를 해주지 않으면 신경이 온통 이쪽에 쏠려서 수업 진행이 안 된다는 것을 여러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한 번은 수업 중에 갑자기 전화기를 가지고 나가며 말한다.
"엄마한테 전화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잠깐만 B야, 혹시 어디 아프니?"
"아니요. 아까 물을 마시다 흘렸는데 계속 옷에서 토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요. 엄마한테 말해야 돼요.”
"아, 옷이 젖어서 불편하구나. 그런데 엄마한테 전화한다고 바로 해결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우선 선생님이 휴지로 꾹꾹 눌러서 닦아줄게. 그리고 마를 때까지 우리 조금만 기다려볼까? 교재 딱 1장만 풀고 그때도 불편하면 엄마한테 전화해 보는 게 어떨까?"
"지금 전화해야 하는데... 네 알겠어요. 1장만 풀고 전화할게요."
망설이다가 자리로 가서는 옷 한번 만지고, 문제 한 문제 풀고를 반복하다 어느덧 다 풀고는 쉬는 시간에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아까 옷이 젖어서 토냄새가 났는데 이제 괜찮은 것 같다고.
B는 내가 만난 아이들 중에서 가장 예민한 아이였다. 이 아이의 수업이 있는 날에는 아예 구급약품 상자와 테이프 등을 한구석에 가져다 두곤 했었다.
"선생님, 저 자리 옮겨도 돼요? 빛 때문에 여기에 앉지 못하겠어요."
"선생님, 테이프 있어요? 책이 찢어졌어요."
"선생님, 옆에서 소리가 들려 문제를 못 풀겠어요."
평소에 가장 좋아하던 자리도 어떤 날은 빛 때문에 앉지 못하고, 교재가 1mm만 찢어져도 바로 테이프를 붙여야 하고,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춥다고 해서 겉옷을 덮어주면 곧 덥다고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하던 아이였다.
B의 어머니와 상담 전화를 할 때면 아이의 이런 기질을 걱정하시며 양육의 어려움을 토로하시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타고난 기질을 아예 바꿀 수는 없지만, B가 예전보다 참을성도 생겼고 대화를 통해서 현재의 상황을 이해시키면 상황을 받아들이려 한다고 말씀을 드렸었다. 실제로 B는 학년이 올라가면서 조금씩 민감도가 낮아지고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예민한 아이들은 불안도가 높고, 오감이 평균 이상으로 발달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아이들보다 외부의 자극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짜증과 울음도 많다. 또한 신체적 또는 정서적으로 뭔가 자기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잘해왔던 것들도 집중하지 못하게 되므로 학습할 때 기복도 심한 편이다.
그러나 예민한 기질이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민한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공감 능력이 뛰어나며, 환경의 변화를 빨리 알아차리기 때문에 상황 판단력이 빠르고 뛰어나다.
내 아이가 예민한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힘들다면 우선은 아이의 선천적인 성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장점을 살리는 방향으로 양육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아이가 하는 말에 집중하고 공감해 주는 태도가 가장 필요하다.
먼저 공감을 한 후, 대처를 해주거나 대화를 통해서 현재의 상황을 이해시키고 변화에 천천히 적응해 나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 대부분의 예민한 아이들도 고학년이 되면서 조금씩 순응하고 편해지는 것 같다. 이는 다양한 환경과 사람들을 경험하면서 적응력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어릴 적에 매우 예민한 아이였고, 일곱 살 때까지도 엄마와 떨어지는 것을 극도로 불안해하는 분리불안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이 셋 중 내가 가장 기질적으로 키우기 힘든 아이였다고 말씀하시곤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의 이런 예민한 기질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세심하게 파악하고 상황에 맞게 지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예민함은 기질적으로 타고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예민한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와 지도하는 선생님들에게 많은 인내심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민함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기질을 가진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자신의 장점을 살려서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조력자가 되어주는 것이 우리 어른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