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계 중소기업 VS K-중소기업
한국 책임자는 대표이사 자리에 앉았다. 주식을 보유하지 않은 순수한 월급쟁이 사장이었다.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사장은 주주인 일본 모기업과 그 기업 대표인 T회장의 지시 전부를 통역사인 필자를 통해 전달받았다. 사장이 경영이라는 것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고, 주식 100%가 일본 모기업에 있었기에 모든 서류나 업무 방식을 일본에서 필자가 받아 제로(0)에서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업무 방식이나 경영 스타일, 사(社)문화 전부가 일본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장은 T회장이 한국에 올 때마다 보여주는 모범적인 행동을 모방해야만 했다. 그것이 자의였든 타의였든, 사장은 필자와 선원 10명을 만날 때마다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존중했다. 물론 겉모습만 보고 배운 것이라 진심으로 우러나온 행동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어쨌든 따라하려 노력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태도였다.
T회장은 직원에게 자신이 마실 커피나 개인적인 심부름을 절대, 단 한 번도 시킨 적이 없었다. 회장이 시키지 않으니 사장도 시키지 못했다.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직접 타 마시고, 자기 일은 스스로 했다. 일반 사무담당 직원을 채용한 후에도 문화는 바뀌지 않았다. 필자 역시 필자가 마실 커피는 직접 탔고, 필자의 개인적인 일은 직접 처리했다. 그래서 이 회사, J계 중소기업이 첫 직장이었던 필자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여직원들에게 자신이 마실 커피를 타오라 시키고, 개인의 은행 업무를 부하직원에게 시키는 일은 드라마에서나 존재하는 먼 예전, 7~80년대의 이야기라고만 여겼다. 퇴사하기까지. 아니, 퇴사하고 나서도.
그런 필자의 '당연'을 깨트린 것은 순수 대한민국 태생의 중소기업이었다.
T회장이 병을 얻어 돌아가시면서 필자가 다니던 J계 중소기업 경영진이 모두 바뀌었다. 아들이 둘 있었지만 모두 제 일을 하고 있었고, T회장이 병을 얻은 원인이 한국의 중소기업을 인수하던 과정 중에 받은 스트레스라 여긴 탓에 아무도 이 기업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새로운 경영진은 한국인들로 꾸려지게 되었고, T회장이 아닌 경영진과 일하고 싶지 않았던 필자는 새 경영진들이 고용승계를 하지 않는 형식으로 퇴사했다.
퇴직금과 실업급여로 약 2년 가까이 쉬다가 재취업을 준비했다. 전문인 일본어를 살릴 수 있는 회사였으면 했으나 당시 대한민국의 분위기가 따라주지 않았다. 한국에 투자하는 일본인이나 기업들이 줄줄이 철수하고 손을 떼는 시기였다.
어쩔 수 없이 일반 기업에까지 이력서를 넣었다. 경력을 눈여겨 본 몇 회사에서 면접 연락이 왔다. 그중 한 회사가 필자에게 희망을 보여 주었다. 면접을 보던 당시 "현재 일본 지사를 낼 준비중에 있으니 그 일을 함께 진행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필자는 더 돌아볼 필요 없이 그 회사를 택했다. K-중소기업과의 첫만남이었다.
면접때까지의 분위기는 좋았다. 부친에게서 대표이사 자리를 물려 받았다는 40대 중반의 대표가 자신을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 출신이라 소개했고, 필자를 대하는 태도 역시 바람직했다. 일본 지사 설립 업무가 진행되면 필자가 J계 중소기업에서 받았던 연봉을 맞춰주겠다는 제안도 좋았다. 그렇게 첫 출근한 날.
면접때 가진 좋은 이미지가 하나씩 깨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