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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 Jan 10. 2021

어차피 계획은 세워서 뭐 해

팬데믹 시대에 새해를 맞이하는 일.

새해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죽었다는 생각을 했다. 훌쩍 간 한 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지, 또 벌컥 찾아온 새해에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하는지 막막해졌다. 시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거창한 계획은 세워봤자 마음만 상하지. 어차피 계획을 세워서 뭐하려나. 암담해졌다.


한 해 동안 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사는 곳을 바꾸었고, 직장도 바꿨다. '바꾸었다'라는 간단한 서술어로 이 모든 걸 설명하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모든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잠 못 이룰 정도로 고민해야만 했고, 몸무게도 줄었다. 20년 가까이 머물던 곳을 가까스로 떠나왔고, 새 직장에서의 어색함을 견뎌내야만 했다. 상황을 통째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있어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기필코 허물을 벗어내고 새로운 나를 맞이했다. 때때로 허둥지둥하고, 아쉬운 소리를 하며, 상처 받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썼다.




12월 말부터 슬쩍 우울해졌다. 밀린 책을 읽었고, 책상 앞에 덩그러니 앉아 있다 아무 영상을 보고 실없이 웃기도 했다. 12월 31일에는 저녁 11시쯤 꾸뻑 졸음이 왔고, 허탈하게도 눈을 뜨니 새해였다. 커다란 버킷리스트는 여전히 비어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니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어쩌다 뉴욕 브이로그 같은 것을 보았다. 지구 바깥처럼 존재하지만 영원히 닿을  없을  같던 서울  도시들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평소라면  지나치겠지만, 흔들리는 카메라로 잡은 아주 평범한 일상은 분명 감동적이었다. 물건을 사고, 거리를 걷고, 요리하고 밥을 먹는 일상적인 장면들이 펼쳐졌다. 다시금 미술관들을 따라 걸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주 오랜만에 떠올린 순수한 '싶다'는 마음의 태도를 바꿔 놓는다. 퇴근 후 급하게 차려 먹는 저녁 대신 건강한 밀프랩을 시도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 시간 정도 일찍 일어나 매트를 펴고 요가를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바람은 여느 날처럼 흔적도 없이 없어지겠지만 그래도 좋다. 미처 지워지지 못한 채 슬며시 사라질 버킷리스트조차 간절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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