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길이 막혔을 때의 태도
바야흐로 다양한 선택이 가능한 시대다. 어릴 적만 하더라도 텔레비전을 켜면 선택지는 오직 4개뿐이었다. MBC, KBS1, KBS2, EBS. 그러다 서울방송이란 이름으로 SBS가 추가되었다. 요즘은 뉴스나 드라마 또는 예능, 스포츠, 음악, 미용 등 특정 장르나 테마를 기반으로 한 케이블 방송사가 등장하면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채널이 대폭 넓어졌다.
방송사뿐만 아니다.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을 통해서는 전 세계의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을 접할 수 있다. 여기서 제공하는 콘텐츠를 모두 보려고 한다면 하루 종일 시청해도 족히 몇 달은 걸릴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모두 다 본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때로는 지인을 통해 콘텐츠에 대한 추천을 받기도 한다. 또는 바쁜 생활로 그마저도 시간이 부족할 경우, 넷플릭스에서 제목만 확인하고 유튜브에서 해당 영화의 리뷰를 보는 것으로 대신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최근 이북을 구매했다. 그리고 밀리의 서재를 통해 책 구독 서비스를 시작했다. 책이 많다 보니 조금 읽다가 지루하면 다른 책을 다운로드하여 읽는다. 간편하지만 종이 책처럼 진득하게 끝까지 읽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책을 다운로드하고 목차를 검색해서 관심 있는 부분만 읽고 덮어두는 경우가 많다. 마치 서점에서 읽을 책을 고르는 행위와 비슷하다. 어떤 날은 이렇게 책만 고르다 저녁 시간이 지나가는 경우도 있다.
너무 많은 선택은 피로를 낳는다. 선택지가 너무 많아 무엇을 결정해야 할지부터가 고민이 되기 때문이다. 영화든 책이든 진득하게 30분에서 1시간은 봐야 점점 그 재미에 빠질 수 있다. 초반 5분부터 흥미진진하게 빨려 드는 콘텐츠는 그리 흔하지 않다. 그래서 선택만 하다 내게 주어진 휴식 시간이 모두 소모되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텔레비전을 틀어도 1번부터 100번까지 채널만 돌리다가 30분이 훌쩍 지나간다. 그중에 꽂히는 프로그램이 있어도 중간 광고가 나오면 다시 채널을 돌리게 된다. 그렇게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나면 여운, 감동, 재미보다는 허무함과 피로만 남는다.
현대의 삶도 비슷한 것 같다. 과거에는 직업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았다. 부모의 가업을 물려받거나 농업, 어업, 축산업 등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주로 하는 산업에 종사할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의 선택과 이동 범위가 훨씬 넓어졌다.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는 창업을 하는가 하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일하는 사람도 증가하고 있다. 이렇게 선택의 폭이 넓어지다 보니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내가 하는 선택이 잘한 선택인지, 다른 선택지는 없는지 고민이 늘어난다. 그래서 계속 주위를 기웃거리며 결정에 어려움을 겪는다.
최근 회사에서 신규 사업을 추진하면서 계속 진행이 안되고 막히는 경험을 했다. 어떤 선택을 했을 때 유관부서에서 또는 상급 부서에서 해당 선택지로는 진행이 불가함을 통보받았다. 어렵게 준비한 안에 대해 그런 피드백을 받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선택지가 점점 줄어들었고,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제한되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가야 할 길이 조금씩 정해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가야 할 길이 점점 선명해지고 할 수 있는 것은 우직하게 좁아진 그 길을 걷는 것뿐이었다. 덕분에 선택의 피로감은 줄일 수 있었고, 정해진 길에 몰입하면서 그 안에서 나름의 편안함을 느끼며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선택의 다양함은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꿈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을 들뜨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론 인생길이 막혀도 그 나름의 장점도 있는 것 같다. 누군가 조금씩 내 선택지를 줄여줌으로써, 그때부터는 선택에 대한고민보다 가야 할 길에 좀 더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 계획이 틀어지고, 내 선택지가 거부당하는 것이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닐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