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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기 Aug 16. 2021

날씨에 관하여

해가 떠야만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덧 십 년 도 훌쩍 지난 이야기다. 대학 시절 군대를 다녀오고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영국 런던으로 향했다. 런던을 선택한 이유는 모두가 선망하는 미국 대신 다른 곳을 선택하고 싶어서였고, 또 다른 이유는 공부를 하면서 합법적으로 일을 하며 생계비를 벌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두 가지 외에 영국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영국 날씨에 대한 정보도. 런던에 도착한 건 9월 즘이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사람들은 공원으로 나와 햇빛을 쬐곤 했다. 포근한 기온에 선선한 바람이 부는 기분 좋은 날씨가 이어졌다. 그러다 조금씩 해가 구름에 가려지기 시작했고, 한동안 해를 보지 못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기억이 정확 지는 않지만 6개월 넘게 흐린 날씨를 경험했던 것 같다.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답답하고 우울한 상태가 이어졌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자기는 영국 대학으로 진학해서 철학을 공부한다는 말에, "그래, 영국은 참 철학하기 좋은 날씨를 가졌지."라고 답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날씨에 그렇게 많은 영향을 받을 줄을 몰랐다. 햇빛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정신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어쩌면 처음 겪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로부터 한 참 후 핀란드 헬싱키에 몇 주간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8월의 헬싱키는 백야까지는 아니어도 저녁 10시에도 해가 중천에 떠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환했다. 해가 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런 환경이 내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지도 역시 이곳에서 처음 경험했다. 이건 저녁 늦게까지 전기로 밤을 환하게 비추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마치 생명이 연장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생명을 다하고 죽을 때가 가까워졌는데, 마치 신(神) 이 보너스를 주듯이 "너, 앞으로도 10년 정도 더 살 수 있어."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저녁을 먹고 밖으로 나와 클럽에 가서 신나게 놀고 나왔는데도 아직 해가 떠 있다는 것. 그래서 이제는 집에 들어가야지라는 고민 대신 또 다른 클럽으로 자연스럽게 향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는 지는 것과 같을 것이다. 


 직장을 다니는 나에게 날씨와 관련하여 좌절스러운 순간이 있다면, 바로 주말에 비가 온다는 예보를 접할 때가 아닌가 싶다. 차라리 평일에 비가 오고 주말에는 화창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평일에는 비가 와도 회사에 있으니 그다지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저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이 조금 불편할 뿐. 그러나 주말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주말에 캠핑을 가거나 아이들과 야외 활동을 하기로 약속을 해 놓았는데, 갑자기 기상 예보가 맑음에서 비소식으로 바뀌면 마치 내 마음까지 구름이 낀 것처럼 어둑해진다. 최근에는 지구가 정말 아픈 것인지  기후이변도 자주 목격하곤 한다. 서쪽하늘을 보면 마치 소나기라도 내릴 것처럼 먹구름이 껴 있는데, 동쪽 하늘을 보면 해가 쨍쨍한 경우를 본 적도 있다. 그런 하늘을 보고 있으면, '비를 내리실 건지, 햇빛을 내리쬘 건지, 하나만 하시면 안 될까요?'라는 말이 마음속에서 흘러나온다. 


 환경은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매일 좋은 일만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인생은 없다.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천둥이 친다. 그런 날이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처지고, 때론 우울해 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런 날이 지나고 나면, 먹구름이 조금씩 자리를 비켜주고, 살결을 간지럽히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따스한 햇살이 피부를 간지럽힌다. 흔히 하늘에 검은 구름이 끼고 소나기가 쏟아지면, "날이 좋지 않다"라고 표현할 때가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런 날이 눈을 감고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기에는 참 좋은 날이다. 마치 시골의 어느 한옥 대청마루에 누워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다 상상하면 기분까지 좋아진다. 그리고 거실에 가족들과 함께 모여 마시멜로우를 띄운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거나 오랜만에 보드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에도 좋은 날씨가 된다. 비가 내려 외출하기는 다소 어려움이 있지만 오랜만에 침대에 누워 편안한 선율의 클래식 음악을 틀어 놓고 평소에 읽지 못했던 시집을 꺼내 읽는 것도 괜찮다. 나쁜 날씨를 다른 종류의 날씨로 바꾸는 순간이다.    


  영국의 비평가이자 사상가인 존 러스킨 (John Ruskin, 1819~1900)의 말한다. 

   - 세상에 나쁜 날씨란 없다. 서로 다른 종류의 좋은 날씨가 있을 뿐. -


 가끔 나에게 묻는다. 오늘의 날씨는, 오늘 나를 둘러싼 주위 환경은 어떠한가? 그런 질문에 어떠한 날씨도, 어떠한 환경에도 지혜롭게 해석하고 대처할 수 있는 답을 찾는 과정이 필요하고 생각한다. 그 길을 마련할 수 있다면 살아 볼만한 날들을 이어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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