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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기 Oct 30. 2021

흠집에 관하여

흠집 없는 인생?

 우리 집에는 골동품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나와 함께 한 물건들이 있다. 대학 시절 해외로 여행을 갔을 당시 현지에서 구입한 책들과 옷들 그리고 신혼 때부터 함께 한 가전제품들과 가구들이 그것이다. 요즘은 하나의 제품을 사면 5년 이상 사용하기가 쉽지 않을 때도 있는데, 그것들은 나와 적게는 10년 많게는 20년 이상 함께 했으니 나름 정도 쌓이고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기능도 갖고 있다.

 

 사용기간이 오래된 만큼 처음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없다. 여기저기 흠집이 나있고, 색이 바래져 있다. 누가 봐도 오래돼 보이고 어딘가 모르게 지금의 유행과는 맞지 않은 세월의 흔적이 보인다. 그래서 옷은 점점 외출복보다는 실내에서 주로 입게 되고, 가전제품들은 하나 둘 기능이 고장 난 곳도 있으며 가구들은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칠이 벗겨 지거나 나사를 잃어버려 한 두 군데 삐걱 거리는 곳도 있다. 하지만 뭔가 모르게 편안함을 주는 그것들을 버릴 생각은 아직 없다.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물건들의 세월의 흔적을 보면서 문뜩 우리의 인생은 어떠한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태어날 때처럼 모든 것이 온전히 작동하는 몸을 가지고 있는지? 어디 흠집 난 곳은 없는지 말이다. 요 근래 허리 통증을 겪으면서 관련 자료들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해당 분야 전문가에 따르면 인간의 뇌나 각종 장기들보다 노화를 빨리 경험하는 것이 관절이라고 한다. 나 역시 기억 상실이나 장기 손상보다는 허리 통증과 손목 및 발목 관절의 통증 등으로 몇 년 전부터 병원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을 보니 그 전문가의 말이 일리가 있게 들렸다.  


  최근 욕심 하나를 내려놓기 위해 노력 중에 있다.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내가 가진 조건에 비해 더 나은 경력을 갖었고, 내 실력에 비해 더 괜찮은 성과들을 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여새를 계속 이어서 새 직장에서도 더 좋은 결과물들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그러나 일에 대한 복잡성이 증가하고 나 혼자만 잘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 안에는 더 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실패를 남기고 싶지 않은, 즉 다음 경력을 위해 현재까지 이어온 내 경력에 흠집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어느 정신 건강 전문의에 따르면, 환자 중에 이러한 인생의 흠집을 받아들이지 못해 상담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들 중에는 어릴 때 부모가 최적의 인생길을 세팅해 주고 그 길을 착실히 걸어 남들보다 빠르게 그리고 더 좋은 자리에서 인생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남들보다 이른바 성공을 더 빨리 경험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인생을 살다 보니 더 이상 부모도 앞 날을 예측하여 인생을 세팅해 줄 수 없게 되었다. 본인도 인생에서 여러 어려움을 만나면서 뒤늦게 좌절과 방황을 경험하면서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달에 병원을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흠집 없는 인생, 어쩌면 가짜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흠집 없는 물건이 없듯 그 누구도 인생에서 흠집 하나 없이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새로 산 연필보다 우연히 길 가다 주운 연필을 더 오래 사용했던 경험이 있다. 잘 모르겠지만 새 연필은 아끼느라 잘 사용을 못 했던 것 같고, 그렇게 보관만 하다 사용도 못해보고 잃어버린 적도 있었다. 반면 주운 연필은 어차피 흠집이 있으니 편한 마음으로 자주 사용했던 것 같다.


 인생에 생긴 여러 종류의 흠집은 잘 사라 지지 않을지 모른다. 그 흠집이 내 마음에 깊게 파인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 그러나 흠집 없는 인생은 없다. 누구나 흠집은 있는 것이다. 이왕 흠집이 났으니 이젠 그만 아끼고 최적의 길만 따라가기보다는 좀 더 자유롭게 살아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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