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끄적이 엄마의 짧은 단상

소소한 일상이 모티브가 된 하루 일기.

by Gin

ABC



3호에게는 특정한 말의 패턴이 있었다.

자다가 깨서도, 울면서 소리를 칠 때에도, 기분이 매우 좋을 때에도

항상 ABC를 말하고는 했다.


평소에는 그것이 불편하다 생각하진 않았다.

형, 누나에 비해 전체적으로 느린 아이였기에 처음 ABC를 말했던 날은

그저 신기했고 고마울 뿐이었다.


가, 나, 다 한글을 말하기보다 A, B, C를 먼저 말하였고

엄마, 아빠를 부르기보다 누야- 누야-를 부르던 아이였다.

비교라는 것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를 잘 겪어 본 사람으로서

걸음이 느린 3호에게 스치듯 들렸을 양가의 한숨이 마음에 걸렸다.


발달 검사를 시켜 보는 것은 어떠니?

양가 할머니의 걱정은 끊이지를 않았다.

책에 나온 이론으로도, 소아과에서 영유아 검진을 받으면서도

괜찮다, 걱정 마라. 각자의 속도가 다를 뿐이니 너무 심려치 말아라 했다며

목소리를 가벼이 내면서 내심, 내 마음도 가벼워지길 바랐다.

하루가 갈수록 마음은 조급했지만, 괜찮은 척 주변을 달래며 나도 달랬다.


"ABC!!! ABC!!! 흐아아앙. 누야- 누야! ABC!!!!"


3호가 우악스럽게 울음을 터트리며 짜증을 부리고 소리를 지를 때마다

검사를 시켜보라던 양가 어른들의 말이 귓가를 스쳐갔다.

아무리 괜찮다를 되뇌어봐도 반복되는 아이의 ABC,

그 세 마디가 뇌리를 돌아다니며 점차 마음이 불안해졌다.

괜찮다고 세뇌하던 모든 순간들이 허무가 되어 공중에 흩날릴 뿐이었다.


"마아- 마이떠?"

"어? 오이가찌이?"

"찌즈- 조아"

"이거, 이거!"

"구나아- 자자"


1호의 입원으로 10일을 집을 비웠다가 만난 3호는, 어느새 조잘조잘 병아리가 되어 있었다.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너는 그토록 많은 감정을 여태껏 토해내지 못해 얼마나 답답했을까.


잠이 든 3호를 내려보며 방울방울 흘려만 내었다.

곤한 얼굴로 골골- 코를 고는 3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맙다, 고맙다 연신 고백했다.


그날부터 3호를 재울 때마다 짧은 동화를 써서 읽어주기도 하고

나지막하게 자장가를 불러주면서 마주 보는 3호에게 입모양을 보여주었다.

발음 하나 하나마다 또박또박 모양을 만들어서 아이가 보기 쉽도록 입술을 쉼 없이 움직여댔다.


반짝 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도또카느 에서도- 서또카느 에더도-


반짝 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어수룩한 발음으로 신이 나서 따라 부르는 아이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반짝거리는 작은 별이 품에 내려왔는지, 부신 눈을 감으며 살포시 물기를 닦아내었다.


이후로 아이는 화수분이 터진 것 마냥, 낼 수 있는 소리들은 전부 쏟아내고 있었다.

정확한 발음이 아닐지라도 마음을 표현하고 뜻을 전달하고 있었다.

막막하던 세상에 별이 뜬 것이었다. 반짝거리는 작은 신호가 눈앞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매일 밤, 아이와 노래를 했다.

고정적으로 3-4개의 자장가를 불렀고, 익숙한 노래가 나오면 아이는 나를 보며 입술을 만졌다.

영어로만 표현했던 눈, 코, 입을 엄마- 누운, 엄마- 코오-, 엄마- 이- 하며 손가락을 대었다.

동화를 만든 날에는 아이의 머리맡에 녹음을 켜두고 천천히 읽어주었다.


옛날 옛날 어느 마을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동화를 읽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3호였다.

내용이 마음에 들면 오오? 우와! 하며 방청객 모드로 호응도 해주었고,

글이 끝나갈 즈음되면 쌔액, 쌔액 숨소리로 배경음도 깔아주었다.


ABC는 아이가 내게 하고 싶었던 모든 말이었다.

느리지만 정확하게 건네려던 마음이었다.

ABC 만으로 건넬 수 있었던

3호 만의 시그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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