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듦
밝고 따듯한 미소와 친절함을 가진 네가 선선한 가을바람을 타고 순수한 얼굴로 인사했다.
날 보러 간다는 남자친구의 말에 심심하니 같이 가자고 말했다고 했다.
그날은 남자친구 보다 오히려 너와 만났다는 것이 기뻤던 것 같아.
"솔직히 말하면, 나는 장거리 연애거든.
보고 싶으니까 보러 간다는 이 녀석 말에 배가 아파서 같이 가자고 졸랐던 거야."
남자친구가 한눈을 판 사이, 키득거리며 조용히 속삭이는 네 말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평소에는 잘 티도 안 내는 남자친구가 나를 보고 싶다고 했다는 말이 고마웠다.
감동받은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남자친구는 머쓱했는지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지.
오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냐,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인사를 나누며 음악당 언덕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남자친구는 옆에서 듣기만 했고, 너와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내가 모르던 남자친구의 어릴 적 일들과, 나와 만나기 시작한 이후의 일들과,
여자친구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며 금세 한숨을 푹푹 쉬어대는 네가 귀여웠다.
우리의 대화는 점 점 고민상담이 되어가고 있었다.
연상인 누나와 2년째 연애 중이었던 너는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머쓱해하며 하소연을 내뱉었다.
"연락을 해도 전보다 잘 받아 주지 않아.
바쁘다는 말이 일상이 되어 버렸고 회사 업무에 지쳐서 약속했던 데이트도 까먹기 일쑤고, 만나서도 밥만 먹고 집에 가자는 날이 더 많아졌어.
보고 싶다고 하면 그만 징징대라고 하기도 하고, 보고 싶어 찾아가려 해도 오지 말라고 하고는 연락이 끊기는 것도 많이 서운하더라."
이제는 자신 혼자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는 너의 말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잔상이 슬펐다.
홀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너도 아는지 걱정을 띄운 내 눈빛에 아픈 듯 아련한 미소를 띠는 너였다.
"야, 1년만 참아. 대학 가고 나면 우리도 성인인데 만날 시간은 더 많아지겠지."
남자친구의 말에 우리 둘은 씁쓸함을 침에 녹여 삼켰던 듯해.
아마 그때부터 알아차렸던 것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지났을 때 마주할 장면이 씁쓸함을 넘어 쓰게만 느껴질 거란 것을.
해가 기울며 달이 푸르스름하게 떠올랐다.
너희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네가 하소연했던 말들이 발걸음을 맞춰 하나씩 떠올랐다
반가웠고, 재밌었지만 어딘가 씁쓸한 맛이 남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