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농담 : 보낼 수 없는 편지

재회

by Gin

연락은 오지 않았다. 아니,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남겨두었던 번호는 핸드폰이 고장 나며 바뀌어 버렸고,

편지가 들어있던 메일은 자주 쓰지 않아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채 지나갔다.


비밀번호를 찾으려는 노력은 없었다.

메일함에 도착했을지도 모르는 너의 답장이 무서웠다.

답장에 적혀 있을 너희의 이야기는 잔잔하게 흐를 수 있게 된 시간에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잊어가며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 거라던 누군가의 말이 참, 절묘했다.

너희를 비워내려고 애쓰는 동안 내 곁에는 여러 인연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보다 어리지만 마음을 기댈 수 있었던 인연도, 같은 나이여서 대화가 편했던 인연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 나에게 바랬던 것은 온전한 마음이었고 그것을 줄 수 없었던 나는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상처를 주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진심을 다 할 수 없는 것이 미안했다.

나조차 내 마음이 진심인지 알 수 없어 괴로웠다.

내 곁에 있으며 행복하지 않다고, 함께 있어도 외롭다 하는 그들에게 변명 한마디 내뱉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미처 털어내지 못했던 미련의 그림자가 보였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너희와의 시간이 남긴 상처는 고스란히 남아 숨어 있었다.

어떤 인연과 새로운 시작을 하더라도 마음속 한편에는 '언젠가 이 사람도 떠나겠지?'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깔려 있었다.

점차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지 않았고, 홀로 있는 시간이 편해졌다.

불 한 점 켜두지 않은 공간에 묻혀, 작디작은 온기 하나와 함께라면 이 세상에서 지워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우려던 나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것은 성인이 되어 사귀게 된 직장 동료였다.

같은 나이, 같은 성별, 다정다감한 성격과 봄날의 햇살을 마음에 품은 친구였다.

그녀와 나는 빛과 그림자 같은 사이였다.



넌, 인생을 몇 번이고 살아온 사람 같아.
모든 것에 초연한 것 같으면서도 살아가는 낙이 없어 보여.


그녀는 그림자가 되려는 나를 꿰뚫어 보며 말했다.

끊임없이 세상으로 이끌고 나갔고, 한결같이 따스한 햇살을 비추려 했다.

그녀에게 속수무책으로 녹아든 나는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던 너희와의 이야기를

스르륵 흘리듯이 풀어놓게 되었다. 그녀라면 괜찮았다.

어째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냥, 그랬다.


잔에서 물이 흘러넘치듯, 이야기는 잔 밑바닥의 한 방울까지 전부 내보내었다.

자조적인 웃음을 띠는 나를 보며 그녀는 그저, 눈가를 적실뿐이었다.

이렇다 할 표현 없이 손을 마주 잡았다.


뚝, 뚝 떨구는 눈물방울을 소맷부리로 닦아내며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손만 마주 잡았다.

그것만으로도 시린 세상에 싹이 피어났다.

슬픔을 드러내지 못했던 날 대신해서 그녀가 울어 주었기에 피어난 싹이었다.


그녀는 내게 세상에 나설 수 있는 안내자가 되어 주었다.

오래도록 사람들과의 연락을 멀리 했던 나인지라 이러고도 사회생활이 가능했냐며

호통을 치는 그녀에게 잔소리와 더불어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SNS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세상이 참, 많이도 바뀌어 있었다.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라는 생각에 호기심과 더불어 안심이 되었다.

너희의 흔적이 없는 세상,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농담 : 보낼 수 없는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