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눈
매년 명절이 되면 모든 친척이 지은의 집으로 모였다. 지은의 아버지는 장남은 아니셨지만, 아주 어릴실 적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 하신 형님분을 대신하여 장남 노릇을 해 오신지라 모든 집안 행사며 제사는 전부 지은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평균 10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던 친척들은 전부 남자 형제였기에 아버지는 유독 사람들이 집에 모이는 날이면 지은의 옷차림과 행동에 대해 엄하게 굴었다. 더운 여름에도 긴 팔, 긴 바지를 입게 하였고 사람들이 전부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절대로 옷을 갈아 입지 못하게 하였다. 친척 형제들과 함께 어울려 놀더라도 스킨십을 하지 못하도록 각별히 신경 썼다. 그리고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집에 모인 사람들로 인해 북적 북적한 날이었다.
" 히잉, 진짜 가기 싫은데... "
" 그래도 다 같이 가는건데 너도 가야지, 너 혼자 집에 어떻게 있으려고. "
" 문 잠그고 얌전히 있으면 되잖아. 거기 벌레 많아서 싫단 말이야~ "
" 어휴,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럴까 정말! "
" 빨리 준비들 안 하고 뭐해? 시간 없어. "
" 아빠~ 저 오늘 산소에 안 가면 안 되요? 진짜 딱! 한 번만... 응? 진짜 가기 싫어요. "
지은이 엄마와 실랑이를 벌이는 도중 아버지가 얼른 가자며 재촉했다. 계속되는 지은의 어리광에 혼을 내던 엄마도 지쳤는지 한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는 이야기를 듣고 지은을 다그쳤지만 지은의 고집 또한 만만치 않았다.
" 여보, 우리끼리 얼른 다녀와요. 다들 먼저 출발 해 버려서 이러다 우리가 제일 늦겠어요. 안 그래도 지은이가 벌레라면 기겁을 해대서, 매번 데리고 갈 때마다 다칠까봐 불안했는데 잘 됐죠 뭐. "
" 하아... 그러면 아빠, 엄마랑 고모들이랑 빨리 다녀 올 테니까 문 단속 잘하고 있어. 알겠어? "
" 응, 약속! "
지은은 생에 처음 혼자서 집에 있어 본다는 생각에 매우 신이 났다. 그래서였을까 지은은 어른들이 전부 나가신 뒤 현관문을 꼭 잠그고 있으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말갛게 잊어 버렸다. 산소에 가면 적어도 해가 질 무렵에나 돌아 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거추장스러운 긴팔 옷들도 벗어 던진 채, 지은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거실을 누볐다.
명절에 방송되는 TV 프로그램을 보며 주방에 있는 간식들도 꺼내어 먹고 편한 차림으로 보내는 시간은 너무도 즐거웠다. 매번 제사 준비를 하며 힘들었던 시간들과 달리 오롯이 즐기는 휴일에 지은은 자유를 만끽했다.
" 하암. 졸린데... "
배부름과 나른함에 잠이 오기 시작한 지은은 시간을 확인했다.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지은은 얇은 이불을 소파로 가져오며 키득거렸다. 소파에 누우면서 본 거실의 풍경은 언제 다 치우지 싶을 정도로 어질러져 있었다. 항상 집 안이 깨끗해야 한다며 청소를 강조하는 아버지의 눈에는 쓰레기장이나 다름 없겠지. 혹여 아버지가 돌아 오셨을 때 자신이 난장판을 해둔 것을 보신다면, 두번 다시는 오늘 같이 혼자 있는 날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어휴, 아빠한테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네. "
평소에는 한 없이 다정하고 자신에게 뭐든지 다 해 주는 아버지이지만 화가 나시면 무섭게 변하여 손지검도 하시기에 지은은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고개를 내저으며 이불을 목까지 깊게 끌어 올렸다. 이불의 보드라운 촉감이 살짝 졸려 오던 지은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그렇게 지은은 달콤한 잠에 먹혀 들어갔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지은은 자신의 다리를 타고 올라 오는 낯선 느낌에 살며시 정신이 들었다. 비몽 사몽한 정신에 느껴지는 감촉은 마치 뱀 한 마리가 다리를 타고 올라 오는 듯 했다. 무서움에 몸이 뻣뻣하게 경직 되고 숨이 가빠져왔다. 차가운 감촉은 느릿하게 다리를 타고 유영했고, 공포는 점점 짙어져 갔다. 지은은 공포에 휩쌓여 눈을 질끈 감은 채 잠에서 깬 것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신의 다리를 오르낙 내리락 쓰다 듬는 차가운 손길에 소름이 돋았다. 감은 눈 위로 한번씩 빛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자신이 깨었는지 확인도 하는 것 같았다. 문 단속을 잘 하라던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것이 이토록 후회가 될 줄이야. 계속해서 다리 사이로 들어오려는 손을 피하려 잠꼬대를 가장하여 몸을 뒤척였다.
" 흐음... 으으응. "
지은은 눈도 뜨지 못한 채 소름 돋는 불쾌함에서 도망치려 애를 썼다. 차가운 뱀은 그런 지은을 비웃 듯 계속해서 다리 사이를 파고 들었고, 자꾸만 위를 향해 기어 올라와 은밀한 부분을 스쳐 지나갔다. 그 때 덜컹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지은의 눈가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다리를 옭아 매던 뱀은 빠르게 빠져 나갔고 소파가 출렁이며 묵직한 것이 일어서는 느낌이 들었다.
" 아이고~ 거실이 이게 뭐야? "
" 이놈의 기집애. 이러려고 안 간다고 한거래? "
뒤이어 들리는 발소리와 함께 어지러진 거실을 보며 고모들의 말 소리가 이어졌다. 지은은 그때까지도 굳어버린 몸을 어쩌지 못하고 계속 자는 척 누워 있었다.
" 다녀 오셨어요? "
" 어머, 민욱아! "
" 어머, 너 언제 왔니? "
" 뭐? 민욱이? "
" 충성. 이병, 한민욱 오늘부터 2박 3일 휴가를 명 받았습니다. "
소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몇 달 전 군대를 갔다던 사촌 민욱이었다. 둘째 고모의 아들인 민욱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고모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반갑게 안부를 물었다. 지은은 여태까지 자신의 몸을 쓰다 듬은 것이 민욱임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사촌 형제들 중 어릴 때부터 제일 많이 챙겨주고, 외동인 지은의 옆에서 제일 많이 놀아 주었던 것이 민욱이기 때문이었다.
" 아니, 집으로 안 오고 왜 여기로 온 거야? "
" 엄마도 참. 오늘 제사날인걸 아는데 당연히 이리로 와야죠. "
" 저도 도착 한지 얼마 안 됐어요. 지은이가 피곤했는지 문 열어 주고서 잠 들었구요. "
너무도 뻔뻔하게 말하는 민욱의 말에 지은은 속으로 자신이 일어나도 되는 것인지 눈치를 보았다. 일어나서 민욱과 마주할 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자신이 거실을 어질러 놓은 것도 있어서 아버지께 혼날 것 같아 무서웠다.
" 지은아~ 우리 딸? 여기서 자지 말고 네 방으로 가서 자. 응? "
" 으응... "
" 으이구, 얼른 일어나. 방으로 가자. "
자신을 달래며 깨우는 엄마의 목소리에 지은은 그제야 잠이 깬 척, 이불로 몸을 칭 칭 감았다. 엄마에게 기대어 떨리는 몸을 감추고 방으로 들어왔고,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쓰고는 한 숨을 내쉬었다.
거실에서는 하하, 호호 오가는 대화 사이로 간간히 웃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지은은 자신의 방에 우두커니 앉아 간간히 들려오는 민욱의 목소리에 흠칫하며 떨었다.
' 에이, 설마. 내가 꿈을 꾼 건가? 아닌데, 너무 생생했는데... 엄마한테 말 해도 될까? 아니야. 그냥 나만 모르는 척 하면 되지 않을까?'
수많은 생각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었다. 머리 속에서는 여러가지 물음표들과 의심이 뒤섞여 서로 싸우고 있었다. 그 속에는 과연 부모님이 자신의 말을 믿어 줄 것인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마음도 자리했다. 되려 이상한 소리를 한다며 혼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지은의 마음을 잠식해 가고 있었다.
똑, 똑, 똑.
천천히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지은은 저도 모르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누웠다.
끼익 소리와 함께 천천히 문이 열리며 밖에서 들리는 소음들이 잠시 커졌다 작아졌다.
" 아직도 자니? 민욱이 간다는데 인사는 해야지, 지은아? "
" 큰엄마, 괜히 깨우지 마세요. 저 괜찮아요, 많이 피곤 한가보죠. 그냥 두세요. "
" 쟤가 오늘따라 왜 저런담? 매번 너만 오면 그렇게 좋아 해놓고는. "
" 아, 아까도 컨디션이 안 좋아 보였어요. 저 이만 가 볼게요. "
덜 닫힌 문 틈을 힐끔, 힐끔 쳐다보며 엄마를 말리는 민욱의 모습이 보인다. 빠르게 문으로 향하는 민욱의 발 소리에 조급함이 묻어 났다. 귓가에 맴도는 나지막한 민욱의 목소리에 찬 바람이 살갗에 스치듯, 모든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이불 속의 지은은 현관 문이 닫힐 때까지 내쉬는 숨 조차 멈추고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