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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yes

숨겨진 눈

by Gin

#3.




그 이후로 민욱은 휴가 때가 되면 어김없이 지은의 집을 찾았다. 지은의 엄마는 살갑게 굴면서 아들 노릇을 톡톡히 해주는 민욱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점점 경계를 낮춰 갔다. 처음에는 너무 자주 오는 것 아니냐며 핀잔을 주던 아버지도 어느새 민욱에게 마음 한 켠을 내어 주고 있었다.

지은은 그날 이후로 자꾸만 부모님의 눈을 피해 교묘히 자신과의 스킨십을 시도하는 민욱으로 인해 의심이 확신으로 변해갔다. 그가 찾아 올 때마다 다시금 재생되는 그날의 공포에 매일 밤 악몽을 마주하고 있었다. 한 번 심어진 검은 의심은 지은의 두려움을 양분 삼아 제 몸집을 키워 나갔다.


" 큰 아빠, 제가 내일 근처에서 볼 일이 있어서 그런데... 혹시 오늘만 여기서 자고 가도 될까요? "

" 저기, 그게... 아무리 민욱이 너라도 그건 좀... "

" 갑자기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해요. 저도 민폐라는 것은 아는데... 제가 집에 들렀다가 다시 와서 볼 일을 보고 가기에는 복귀 시간까지 여유가 없어서요. 그렇다고 모텔에 가기도 좀 그래서... "

갑작스러운 민욱의 부탁에 엄마는 지은을 힐끗 보며 만류하였다. 엄마는 어느 순간부터 시작 된 지은과 민욱의 사이의 묘한 기류를 어렴풋이 느꼈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식탁 위에는 정적이 내려 앉았고 들리는 것이라고는 식기들 소리 뿐이었다.


" 민욱아 미안한데 아무래도 그건 어렵지 않을까 싶어, 네가 마땅히 잘 곳도 없고... "

" 저 소파에서도 잘 자요. "

" 아니, 아무리 그래도 손님인데... "

" ... 그렇게 해라. 여기서 대구까지 왕복하는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하지. 그러다 복귀 시간 놓치면 큰일이기도 하고. 그리고 당신, 조카도 자식이야. 하물며 다른 아이도 아니고 민욱인데 뭘 걱정하나. "

" 아니... 아무리 그래도 마땅히 재울 곳이 없는데... "

" 아, 소파에서 잔다 잖아. 당신은 얘 이불이나 잘 챙겨 주고. 지은이는 오빠 불편하지 않게 애지간하면 새벽에 거실 돌아다니지 말아라. 어휴, 방을 내주지는 못 할 망정... "

" 감사해요 큰아버지. 제가 괜한 부탁을 드려서... "

" 됐다, 네가 오죽하면 그런 소리를 했을까. "


조용히 식사를 이어가던 아버지가 허락을 했다. 지은은 아버지의 허락이 믿기지 않는 듯 식사를 하던 움직임을 멈추었고, 엄마는 굳어버린 지은과 아버지 사이를 번갈아 보며 조용히 눈치만 보았다. 숟가락을 내려 놓은 아버지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 숨을 내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은은 미동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민욱이 괜한 말을 해서 죄송하며 재차 엄마에게 사과를 했고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은의 눈에는 그 모습 조차 이질적으로 보일 뿐이었다. 민욱의 행동 하나, 하나에 의심의 색은 짙어져만 갔다. 엄마는 어색하게 웃으며 지은의 얼굴을 살피다 아버지를 따라 방에 들어갔고, 두 분이 문 너머로 사라지자 민욱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며 피식 웃었다.


" 그냥 가... "


지은은 테이블 밑에서 주먹을 꽉 쥐며 조용히 말했다. 스멀 스멀 올라 오는 불안함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손이 하얘지도록 힘을 주었다.


" 으음, 싫은데? 내가 왜? "

" 볼 일 있다는 것 거짓말이잖아. 그냥 가 제발... "

" 거짓말 아니야, 볼 일 있어."


귀엽게 투정을 부리는 동생을 보듯 웃으며 말하던 민욱은 지은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움찔거리며 피하는 지은을 보며 더욱 가까이 다가서서 결국 지은의 머리카락을 손에 넣고는 천천히 문질렀다. 지은은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은 느낌에 입술을 짓이겨 물며 새어나오는 경멸을 속으로 삼켰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는 것이 두려웠다. 방에서 울리는 시계 초침 소리에 맞춰 심장이 널을 뛰었다. 굳게 닫힌 문 너머에 부모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은은 계속해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 춥지는 않겠니? "

" 에이, 한 겨울도 아닌데요. "

" 소파도 좁아서 불편할텐데. 차라리 지금이라도 호텔을 잡는게... "

" 당신,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요. 넌 신경쓰지 말고 편히 쉬고. "

" 죄송해요, 큰아버지. 괜히 폐만 끼치고.. 다음부터는 그냥 방 잡는 게 나을까봐요. "

" 녀석, 별 소리를 다 하네. 너랑 나랑 남이냐? 언제든 와서 자고 가도 되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라. "


밖에서 들리는 대화가 지은의 가슴에 칼처럼 꽂혔다. 가슴을 옥 죄는 듯한 고통에 숨이 가빠져 왔다. 손끝의 온기가 서서히 식어가고 아릿한 아픔 마저 느껴졌다. 어느새 파고들은 손톱이 깊게 우물을 만들며 가시처럼 박혔다. 날개가 찢겨져 새장 안에 갇혀 버린 새처럼 어둠이 내려 앉은 방 안에 갇혀 있을 뿐이었다. 새근 새근 숨 소리만 들려 오는 고요 속에, 가끔씩 들리는 발소리와 부스럭 거림도 사라진 시간. 저도 모르게 감긴 눈으로 선잠에 빠진 지은에게 조용한 공포가 찾아 왔다.


톡, 톡, 톡.


천천히 방 문을 두드린 공포는 잠시 기다리더니 다시금 톡, 톡, 톡 소리를 내었다. 지은은 눈이 번쩍 떠졌지만 이내 귀를 틀어 막으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두려움에 몸이 벌벌 떨렸지만 가까스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입을 틀어 막으며 새어나가는 소리를 막았다.

몇 번 더 소리가 난다면 적어도 부모님 중 누구 하나는 잠에서 깨시겠지.

덜컥, 문 손잡이를 잡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크게 느껴지는 소리에 평소 잠귀가 밝으신 엄마, 아빠가 듣고 깨시기를 바랬다. 잠깐의 정적 속에서 지은은 처절함을 담아 빌고 또 빌었다.


달칵.


두려움에 손이 벌 벌 떨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 올라 마치 깊은 물 속에서 허덕이는 기분이었다. 손에서 문고리가 떨어져 나가는 소리와 동시에 심장이 쿵 내려 앉았다. 지은의 처절한 기도는 그토록 쉽게 허공에 흩어져 버렸다. 이건 악몽이야, 매일 밤 끝없이 괴롭히던 꿈일 뿐이야. 괜찮아, 조금만 버티면 언제나처럼 이 악몽은 끝날거야. 다 괜찮아 질거야.


" ... 자니? "


열린 문 틈 사이로 악몽이 발을 들이 밀었다. 뒤집어 쓴 이불 속 꼭 감은 눈 사이로 흐르는 눈물은 점, 점이 베겟잎을 적셔 들었다. 다가올 고통에 이를 악 물면서 숨을 몰아 쉬는 지은을 보며 악몽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끼익-


악몽이 들어 선 방의 문이 닫혔다. 지은에게만 길고도 긴, 홀로 버텨야만 하는 지독한 아픔의 지옥이 시작되는 소리였다. 이불 속으로 스며든 악몽의 손길은 처음에는 차가우면서도 친절한 듯 굴었다. 스스슥 지나가는 손길은 소름을 돋게 하고, 마주 닿아 오는 숨결은 진득하게도 몸을 감아 왔다.


" ... 자는 것 맞겠지...? "


살며시 지은의 다리 사이로 손을 밀어 넣던 악몽은 잠시 멈칫하더니 중얼거렸다. 이 모든 것은 꿈이라 생각하며 악몽에서 벗어나려는 지은의 귓가에 들린 민욱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욱 낮은 목소리로 무척 긴장되어 보였다. 차라리 방금 깬 척 움직여 버릴까? 뭐하는 짓이냐고 소리를 지를까? 잠꼬대 인 것처럼 몸을 뒤척이면 알아서 나가지 않을까? 정신을 마비시키는 두려움으로 인해 제대로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토록 좋아하고 따르던 민욱이 눈 앞에 있는 것이라면? 이 모든 악몽이 정말 꿈이 아닌 사실이라면? 지은이 속으로 혼돈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악몽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지은의 온기를 빼앗아가며 온 몸을 유영하던 뱀은 이내 봉긋한 언덕에 올라 아가리를 벌렸다.


" 흣! "


불현듯 느껴지는 감각에 순간 놀라 소름이 돋아나며 몸이 얼어 붙었다. 살살 어루만지다 꽈악 쥐어보기도 보기도 하고, 언덕 위 피어있는 꽃을 건드리며 향기에 취한 듯 춤을 춰댔다. 지은은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림에 당황했다. 기묘한 감각에 아랫배가 욱신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 낯설고 무서웠다. 그녀의 목덜미에 닿아오는 뜨거운 숨결은 마치, 화농이 떨어진 듯 강렬하게 그녀를 감싸며 아찔한 공포를 자아냈다. 스멀 스멀 기어가며 이곳 저곳을 탐닉하던 뱀은 오목하게 들어간 우물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지은은 끝이 없는 뱀의 욕심에 마음 속 깊은 바다 속으로 침잠해갔다.


' 제발 그만해... 무서워, 싫어...! 그만, 그만! '


자신도 모르게 열이 차오르는 몸이 불쾌했다. 아랫배에서 느껴지던 욱신함은 더욱 강해져만 갔고, 돋아 오르던 소름은 이내 발끝을 저리게 했다. 그때 저벅, 저벅.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등장했다. 일시 정지 버튼이 눌린 듯 두 사람은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발 소리는 잠에 취한 듯 주방으로 향했다.

또로로록 정수기에서 물 소리가 들리고 이내 탁, 내려 놓는 소리가 들린다. 지은에게 꼭 붙어 있는 악몽에게서 빠르게 심장이 뛰는 느낌이 등을 타고 전해 졌다. 어찌나 빠르고 세차게 뛰는지, 마치 우퍼 앞에서 노래를 들을 때 느껴지는 울림 같았다. 발 소리가 점차 지은의 방 쪽을 향해 움직였다. 저벅, 저벅. 소리가 다가오자 악몽은 빠르게 지은의 입가를 손으로 막으며 쉿, 하고 경고했다. 한 발짝 움직이는 소리마다 온 몸을 감싼 악몽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지은은 벗어나려 꼼지락 거렸지만 강한 힘을 밀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간이 지나 발 소리의 주인은 다시 방으로 갔지만, 그들은 한동안 심장을 다독이며 잠시 멈춰 있었다.

어느덧 등을 통해 느껴지던 울림이 잦아들자 악몽의 팔이 느슨해졌다. 힘이 빠진 민욱은 자신에게 안겨 있던 지은이 깼음을 알아챘다. 민욱은 잠시 망설였지만 살며시 손을 들어 지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얕은 한 숨을 내쉬었다.


" 미안.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


목 뒤에 고개를 파 뭍은 채 민욱은 작게 읊조리며 지은을 꽉 안았다. 처음과는 다른, 자신을 조심히 다루는 듯한 느낌에 지은은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여태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처럼 민욱의 목소리는 혼란이 가득했다.

민욱은 품 안에 안긴 지은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갛게 보이는 지은의 목덜미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지은의 움찔거림이 입술을 통해 느껴졌지만, 코 끝을 홀리는 달콤함에 취해 떼고 싶지는 않았다. 양껏 빨아 들여진 달콤함이 자신의 몸 속에 가득 담기기를 바랬다. 그러면 이 미친 짓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목을 물린채 내어주고 있는 지은은 밀려드는 혼란을 막을 수 없었다. 미안하다며 내뱉은 말을 채 받아 들이기도 전에 와 닿은 입술은 용암을 가져다 댄듯 너무도 뜨거웠다. 농밀한 뜨거움에 물려버린 부위가 녹아 내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즈음 양껏 배를 불린 것인지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심장은 터질 것 같이 뛰어 댔고, 어느새 지은 또한 뜨거운 숨을 가쁘게 내뱉고 있었다.

목을 타고 퍼져나간 뜨거움은 다시금 아랫배를 욱신거리게 하며 발 끝을 저리게 했다. 소름이 돋게 기묘한 감각은 지은을 나른하게 하면서, 감각을 마비시킨 듯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몸이 가벼워지며 떨어져 나간 온기에 자리한 서늘함이 몽롱했던 정신이 일제히 돌아 오게 했다.


' ...아쉬워... '


몽롱한 정신 속 떠오른 단어에 지은은 뇌격을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아쉬워? 뭐가?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떨어져 나간 뜨거움에서 아쉬움을 느끼다니! 침대가 일렁이고 악몽이 문을 나설 때 까지도 지은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뜨겁고, 나른하고, 몽롱했던 그 모든 것들이, 신경에 독이 퍼지듯 서서히 퍼져 나가던 기묘한 감각으로 인해 자신이 미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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