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눈
지이잉- 지이잉-
머리 맡에서 울리는 진동에 지은은 눈을 떴다. 약 기운에 멍한 정신으로 핸드폰을 확인한 지은은 자리에서 일어서다 잠시 멈칫했다. 다리 사이로 미끈하게 느껴진 불쾌한 감각에 어이가 없어진 지은은 입술 끝을 씹으며 인상을 썼다. 불쾌했던 기억에 반응 해버린 몸이 역겨웠다. 그렇게도 질색을 하는 인간이 떠올랐음에도 솔직하게 반응 해버린 몸에 욕지기가 치밀었다.
" 그 꼴을 겪고서도 느낀거야? 미쳤지, 미쳤어. "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자신을 향한 비난은 끊이지 않았다. 그 지옥 같던 시간 속에서 느껴왔던 지난한 아픔들을 모두 부정하는 듯한 생물학적 반응에 속에서부터 쓴물이 올라왔다.
" 우.. 우욱...! "
몇 번을 게워내도 켜켜이 들러 붙은 더러움이 전부 꺼내어지지 않는다. 신경 하나 하나에 물들은 얼룩은 통째로 세탁기에 넣어 돌린다 한들 깨끗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지은은 쓰린 속에 물을 흘려 넣으며 끓어 오르는 설움을 내리 눌렀다.
샤워를 하고 물기를 닦아 내며 화장실에 걸려 있는 거울로 자신을 들여다 보았다. 욕실의 차가운 공기 탓인지 핏기 하나 없는 피부에 생기 없는 눈동자. 무의식적으로 짓씹어 댄 입술은 가뭄에 벌어진 논 밭처럼 쩍, 쩍 갈라져 있다. 눈을 내려 자신의 몸을 훑은 지은의 눈동자에는 군데 군데 그어 둔 선들이 너절하게 남아 있고, 뼈만 남은 팔 다리만이 자리했다. 지은은 멍하니 짙게 그어진 선을 손끝으로 만져 보고는 눈으로 차오르는 열감에 그저 빛을 막아 버렸다.
" ... 이럴 때가 아니지. "
한 숨을 깊게 내쉰 지은은 얼마 없는 옷을 입으며 빠르게 출근 준비를 이어나갔다.겉옷 주머니에서 꺼낸 약 봉지를 찢어 털어 놓고는 아그작 씹어 넘기며 하루를 시작해야만 했다.
[ 지은아, 집에 좀 들려... 아버지가 찾으셔. ]
오전 알바가 끝나고 핸드폰을 확인한 지은의 눈에 낯익은 번호가 보였다. 어떻게 알아 낸 것인지, 알려주지 않아도 꾸준히 보내오는 문자는 지겹기만 했다. 반갑지 않은 연락 때문인지, 불쾌했던 아침의 시작 때문인지 오늘따라 약 기운도 빠르게 사라지는 것 같았다. 불안함과 함께 떨려오는 손을 느끼며 빠르게 약을 찾았다. 주머니 속에서 바스락 거리는 약 봉지 소리가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 지은아... "
" ... 여긴... 어, 어떻게 찾아 오셨어요...? "
오후에는 일이 없는 날이었기에 편의점에서 가벼운 요깃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지은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의아해하며 발을 멈춰 세웠다. 바닥만 보면서 걷던 지은의 눈 앞에 서 있는 것은 지독하게 끈질긴 악연이었다. 지은은 떨리는 손은 감추며 말했다. 그와 닮은 얼굴을 마주하는 것 만으로도 온 몸에 알러지가 돋는 듯 괴로워졌다. 눈가가 퀭하니 어두운 것이 며칠 밤을 지새운 사람처럼 보였다.
눈 앞의 여인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지은은 무의식적으로 발을 뒤로 뺐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으로 지은을 바라보다 이내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지은은 주변을 살피고는 일으켜 세우려 다가 섰다.
" 저기, 지은아. 우리 미, 민욱이... 한 번만 만나주면 안 될까? "
" ... 고모?"
" 진짜 다시는 너 찾아 오지 않을게! 정말, 죽어도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테니까... 제발, 딱! 한 번만. 응? 마지막으로 한 번만 우리 민욱이 좀 만나주면 안 되겠니? "
"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시고 일어나세요. "
믿기지 않는 말을 내뱉는 여인을 황망하게 바라보며 지은은 온 몸이 얼어 붙었다. 그녀는 울부 짖으며 무릎 걸음으로 기어와, 지은의 다리를 붙들고는 억지를 부렸다. 지은은 원망과 함께 분노가 치 솟았지만, 상처 입은 짐승마냥 울부 짖는 그녀를 차마 매정하게 내칠 수 없어서 자신을 늪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그녀를 어르고 타일렀다. 매번 자신이 도망을 가도 가족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찾아내어 상처를 헤집었다.
" 너, 너 밖에 없대. 널 봐야... 그래야 살 것 같대."
" 그만이요. "
" 제발... 제발 한번만 응? 너, 너도 우리 민욱이 잘 따랐잖니. "
" 제가 죽어야... 그래야 속이 편하시겠어요? "
" 너 때문에 내 새끼는 이미 죽어가고 있어! "
" 그래서 사라져 드렸잖아요. 죽지도 못하고 숨어 살고 있잖아요! "
" 아, 아니야. 미안해, 지은아. 소리 질러서 미안해. 고모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그래. 그러니까 제발 부탁이야. 우리 아들 좀 살려 주라, 응? 우리 민욱이 좀 한 번만 만나줘 그러면 내가 다시는 너 안 찾아 올게! "
이미 제 정신이 아닌 듯한 그녀의 애원에 지은은 눈 앞이 어지러웠다. 자기 자식을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사람이 이토록 잔인해 질 수 있는 일이었구나 싶었다.
" 제 정신이세요? 고모, 저 고모 조카에요... 그건 아세요? "
" 내 새끼가 너 아니면 죽어 버리겠다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니? "
" 그럼 저는요? 제 마음은요? "
" 너한테 미안하기는 한데 난 내 새끼부터 살리고 봐야겠다. 가자. "
지은의 절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지 팔을 잡아 끄는 그녀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손목이 으스러질듯 아팠지만 지은은 힘겹게 버텼다. 길 한복판에서 데려가려는 자와 버티는 자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지은은 자신에게 매달려 눈에 빛을 잃고 달려드는 고모의 모습에 마치 저승사자가 자신을 붙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 막히는 두려움과 함께 과거, 자신의 마음을 짓 밟는데 일조했던 고모의 말들이 떠올라 배신감에 휩쌓였다.
[ 어린 년이 꼬시는 데 안 넘어 가고 참기만 할 남자애가 어디 있어! ]
[ 저년이 먼저 몸으로 들이 댔겠지! ]
[ 더럽고 천박한 것! 이 짐승만도 못 한 년아! ]
[ 어디 사창가에 가서나 몸 굴릴 것이지, 감히 내 아들을 건드려?! ]
지은은 몰아치는 감정으로 인해 점차 몸이 떨려왔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아픔과 동시에, 붙들린 손목에서부터 자신의 몸을 타고 오르는 수많은 벌레들이 보이는 것 같은 착각에 휩쌓였다. 지은의 눈에 비친 것은 붙들린 팔이 벌레들에게 먹혀가며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는 것이었다.
" 아, 안돼...! 놔! 놓으라고! 시, 싫어...! 싫어! 싫어!! "
발작처럼 이어지는 환각에 지은은 자신의 팔을 붙들고 있는 괴물을 힘껏 떨쳐냈다. 여리기만 한 몸에서 괴력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살고자 발버둥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은에게 매달려 고집을 부리던 여인도 지은의 발작을 보고는 놀라 손을 놓쳤다. 떨어져 나간 팔을 연신 긁어대며, 눈에 초점을 잃은 채 소리를 질러대는 지은이 보였다. 옷 위를 긁어대는 것으로 모자랐는지, 앙상한 팔을 드러내며 피가 나도록 긁어대는 지은의 행동에 여인은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 싫어! 하지마...! 그만, 그만, 그만! 제발! 싫단말이야... 싫다고! "
이내 온 몸을 긁어가며 정신을 놓은 듯 흐느끼는 지은의 모습이 너무도 애처로웠다. 지은은 환각으로 인해 보이는 처참한 지옥 속에서도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팔을 쥐어 뜯으면서도 주변을 더듬거리며 약봉지를 찾아 헤메었다. 손 끝에는 진득하고 따뜻한 것이 묻어 나고, 코 끝에 비릿한 혈향이 감돌았다. 진한 피 비린내에 역겨움이 몰려들 때, 지은은 빠르게 약을 씹어 삼키고는 눈을 감고 연신 되뇌었다.
" 이, 이건 꿈이야... 이건 꿈이다... 현실이 아니야, 꿈이야. 꿈일 뿐이야... "
약 기운이 서서히 퍼지자 생살을 파 먹히는 끔찍한 고통이 차츰 잦아들었다. 고통이 줄어 들며 멍하니 눈을 들어 올리자, 심하게 긁혀 여기 저기 피가 세어 나오는 너절한 팔이 보였다. 그럼에도 지은은 옅게 웃음 지으며 안도를 했다. 이내 눈 앞이 점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