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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yes

숨겨진 눈

by Gin

#1.


" 오랜만이네요, 지은양. "

" 네... "

" 한동안 오지 않길래 괜찮아졌기를 바랬는데. 아직도 잠에 들기가 어렵나요? "

" ... 약이 다 떨어졌어요. 그냥 약만 주세요. "

" 약이 왜 필요한지 알아야 처방 해 줄 수 있다고 전에도 설명 해줬을텐데요. "

" 이야기는 하고 싶지가 않아요. 자려면 약이 필요한데 여기 아니면 구할 수가 없어서 온 것 뿐이에요. "

" 혹시, 본가에 다녀 왔나요? "


재아의 물음에 지은은 입을 닫았다. 지은에게 있어 본가는 일종의 금기어와 같았다. 그녀는 10여년 째 상담 치료를 받고 있는 재아의 오래된 환자였다. 재아는 눈을 피하는 지은을 지긋이 바라만 보며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 ...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아요. 약, 약 좀 주세요. "

" 하아, 어쩔 수 없네요. 대신 언제든지, 어느 시간이던 상관 없이 연락해도 괜찮은 것 알고 있죠? "

" 네. "

" 하루 두 번, 식후 30분 이내에 먹어요. 그리고... "

" 알아요. 한 두 번 오는 것 아니잖아요. 가볼게요. "


재아는 씁쓸함을 입에 머금으며 처방전을 작성 해주었다. 처방전을 낚아 채듯이 가져가는 지은의 손길에서는 조급함마저 보였다. 문을 열고 나서는 그녀에게서 은은한 혈향이 피어 올랐다. 재아는 그런 뒷 모습을 보며 그녀가 또 다시 깨어진 유리판 위에 올라가려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병원에서 나온 길로 곧장 약국으로 향했다. 입술이 달 달 떨리고 숨이 조금씩 가빠져 오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처방 받은 약을 털어 넣고서 이 지독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이 지긋 지긋한 악몽은 자취가 사라져 괜찮아 졌다고 방심할 때 즈음, 또 다시 나타나 자신을 나락의 구렁텅이 속 깊은 심연으로 끌고 들어간다.


" 21,000원 입니다. "


종이 봉투 가득 몸을 구겨 넣은 약들은 지난 10년간 밥보다 더 많이 먹었던 것들이었다. 집에서도 병원에서도, 도망을 다니면서까지도 이것만큼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어서 괴로웠다. 그렇게 생 살을 쥐어 뜯어 가면서 참아내었던 약인데, 약국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약 봉지 하나를 뜯어 입에 털어 넣었다. 아그작 아그작 증오하는 상대가 눈 앞에 있는 듯 그렇게 짓이겨 삼켜 넘겼다. 지은에게 고통이란 삼켜 넘겨야만 하는 쓰디 쓴 독약이었다.


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단촐한 4평 짜리 단칸방. 그 흔한 냄비 하나, 그릇 하나 없고 바닥에는 속이 헤집어져 입을 벌린 백팩 하나와 구겨진 페트병들 뿐. 덩그러니 놓인 매트리스 위로 아무 무늬 없는 짙은 어둠 뭉치가 대충 올려져 있다. 화장실에도 외로이 놓인 칫솔 하나, 그 곁을 지키는 것 또한 오롯이 수건 한장 뿐이다.

약 기운이 돌아 나른해진 몸을 이끌고 지은은 세탁기를 돌렸다. 이사 올 때부터 놓여 있던 세탁기는 제대로 작동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덜덜 거리며 소음을 만들어 냈다. 통돌이 세탁기가 만들어 내는 소음은 텅 빈 공간을 울리며 소리를 키웠다. 뚜겅을 들어 삐그덕 거리며 돌아가는 세탁조 안을 보며 지은은 차라리 저 안에 들어가 같이 돌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면 이 얼룩진 삶이 조금은 깨끗해지지 않을까.

벽에 기대어 감은 눈 사이로 제멋대로인 악몽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자신을 무시하기에 바쁜 엄마, 자신을 마주하기만 하면 더러운 벌레 취급하는 아버지가 있는 역겨운 집. 그렇게 질색을 하면서도 명절마다 집에 안 오냐며 온갖 욕을 늘어 놓는 두 사람 때문에 억지로, 억지로 지옥을 찾아간다.


나는 왜 이 길을 걷는 것일까. 이제는 그 때처럼 어리지 않으니까 가지 않아도 될텐데. 피할 수도 있고, 다시 도망쳐도 되는데 왜 다시 이 길에 서 있을까. 한 걸음, 한 걸음이 족쇄를 찬 것처럼 무겁기만 하다. 내딛는 걸음 마다 온 몸에서 피가 주욱, 주욱 뿜어져 나온다. 죽었음에도 죽지 못한 좀비처럼. 어거지로 꿰어 맞춰져서 움직이는 프랑켄슈타인처럼. 아직도 선명한 지옥 속으로 가는 문이 열리는 것을 막지 못한다.

창을 뒤덮은 먼지 사이로 힘겹게 스며드는 빛이 눈에 닿는다. 눈가에 버석한 자욱은 저도 몰래 흘러버린 고통의 조각일까. 손으로 무심히 벅 벅 닦아낸 지은은 옷 위에 내려 앉은 먼지를 툭하고 털어 내고 흐트러진 머리를 질끈 고쳐 묶었다.


" 지은씨~ 식판 좀 빨리 씻어줘! "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지은을 못 마땅한 눈으로 흘기던 팀장은 이내 다른 업무로 바쁘게 자리를 떴다. 귀에 이어폰을 꽂아 넣고서 설거지를 이어가는 지은은 아무 소리도 듣고 있지 않았다. 웬만하면 사람과 마주하지 않는 일. 웬만하면 구석에서 말 없이 있어도 되는 일. 도망을 다니며 터득한 그림자의 모습으로 몸은 고되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만을 고집 해왔다. 사람들 사이에 있지만 눈길이 닿지 않을만한 공간에는 항상 지은이 있었다.

지은은 자신에게 와 닿는 사람들의 눈길도, 자신의 모습이 담길 수 있는 그 어떤 자리도 견뎌 내기가 힘들었다. 특히나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평범한 휴대 전화 조차도 스쳐 지나갈 때마다 흠칫하고 몸이 움츠러 들었다.

오전 알바를 퇴근하는 길,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어 씹어 삼킨다. 주어진 복용법 따위는 쉽게 무시한 채 고통이 시작될 기미가 보이면 무조건 입에 넣고 본다. 아그작, 아그작. 무의식에서 떠오르려는 얼굴들을 씹어 삼킨다.


" 하아... "


내 뱉은 숨 한 자락이 허공에 흩어지듯 자신도 그렇게 사그라들면 좋을텐데. 잠시 먼 곳을 바라보던 지은은 약 기운에 고통이 희미해지면 곧바로 다음 일로 향한다. 잠시라도 쉬면 악몽이 찾아올 것이기에 독하게 몸을 굴려야 했다.


"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오랜만에 한 잔들 어떠세요? "


저녁 알바가 끝나자 퇴근 길에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지은은 그들 무리를 지나쳐 퇴근 준비에 속도를 높인다. 하루 치 버팀의 총 양이 이미 소진이 되어버린 지은은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바닥만을 보고 걷기 시작했다.


" 아니, 쟤는 맨날 왜 저렇게 음침해? "

" 아유, 괜한 소리 마. 요즘 애들 잘못 건들면 사고 난다니까? "

" 사고는 무슨! 나이도 어린 것이 매번 사람이 불러도 들은 채도 안하니까 그렇지. "

" 아이고, 엮여서 좋을 것 없어 이 사람아. 그냥 신경 끄고 얼른 목이나 축이러 갑시다요~ "

" 에잇... 퉤! "


자신의 뒤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묵묵히 바닥을 보고 걸었다. 저 정도의 험담은 가렵지도 않을 정도였기에 무덤덤한 지은이었다.


[ 이, 쓰레기 같은 년! ]

[ 더러운 년! ]

[ 왜 너 같은 게 태어나서는! ]


집에서 도망쳐 나오기 전까지 숱하게 듣던 욕들로 이미 단련이 되어 있던 지라 지은은 웬만한 욕에는 상처를 받지 않았다. 아니, 상처가 되지 않았다. 지은이 집에서 도망친 것은 고작 17살. 쏟아지는 폭언과 폭행 그리고 참을 수 없이 퍼부어지는 모욕에 모든 것을 버렸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울면서 용서를 부르짖는 지은의 말을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온 몸이 처참히 망가져 느껴지는 아픔 보다 자신을 부정하기만 하는 따가운 시선에 지은의 내면은 갈갈이 찢겨져 결국 정신을 놓아버렸다. 그렇게 지은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해 버렸다.


아들만 줄줄이 사탕이던 집안에 한 떨기 고운 꽃으로 태어난 지은은 아버지의 자랑이자, 엄마의 트로피 같은 존재였다. 연약하고 아리따운 수선화 같은 미모를 지닌 엄마를 쏙 빼닮아 지은은 어릴때부터 어딜 가나 예쁨을 받고 자랐다. 딸의 미모를 자랑스러워 했던 아버지는 지은을 항상 옆에 끼고 다녔고, 딸 바보임을 숨기지 않고 살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지은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고, 초경이 시작되었다. 지은이 부모님께 초경에 대해 알리자 아버지의 걱정은 점차 심해졌다. 지은은 그 사이 2차 성징으로 인하여 빠르게 몸이 변하면서 아이에서 숙녀로 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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