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눈
" 지은 양, 정신 좀 차려 봐요! 빨리 진정제 좀 가져와요! "
강하게 흔들리는 몸을 느끼며 지은은 잠에서 깨어났다. 멍 한 상태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을 붙들고 있는 재아와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간호사들이 보였다.
" 선... 생님....? "
" 하아... 지은 양! 괜찮아요? 정신이 좀 들어요? "
버석거리는 입술로 재아를 부르자, 식은땀을 흘리며 소리를 치던 재아가 놀란 눈으로 지은을 보았다. 지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과 동시에 따끔한 것이, 메말라 버린 입술이 다시금 터진 것 같았다. 기운이 쭉 빠져버린 재아는 전공의에게 간단하게 오더를 내린 뒤, 보호자 석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 지은 양은 참 사람 걱정시키는 재주가 있어요. "
" 제가요? "
" 네. 정신과 의사를 이 정도로 궁지에 몰아붙이다니. 엄청난 재주네요. "
재아는 자신의 말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하는 지은에게 턱으로 고갯짓을 했다. 지은은 살짝 몸을 일으켜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끈적한 감각이 지은의 몽롱한 정신을 서서히 잡아당겼다. 뒤늦은 통증이 강렬하게 신경을 깨우며 그녀를 강제로 연행하여 현실로 끌고 왔다. 양팔을 감싸고 있던 붕대는 너절하게 찢겨 있었고, 얇은 피부막이 차오르고 있던 상처 부위는 제멋대로 헤짚어진 채 붉은 피를 뱉어 내고 있었다.
" 이게... 뭐죠? 내가 왜? "
지은은 손끝을 떨며 속을 내어 놓고 피를 흘려대는 상처 위로 손을 얹었다. 차갑게 떨리는 손 끝에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온 한숨이 따끔하게 감겨 들었다. 그녀는 말 문을 닫고 혼란스러운 눈으로 재아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죄어 오는 느낌과 함께 다시금 몰려드는 공포와 죄책감이 날카롭게 벼려져 폐부를 찔러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해를 시도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씁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재아를 본 순간 이내 깨달았다.
" 후우, 일단 깨어나서 다행이에요. 지금은 상처 치료부터 합시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해요 우리. "
재아는 절망 속에 파묻힌 듯한 지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지은은 재아의 손길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게 흠칫, 몸을 움츠렸다. 재아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자리를 비워 주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두려움에 지은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붉게 물든 손은 그녀에게 현실과 꿈의 경계를 허물어뜨린 증거로 남아 있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자신을 다 잡으려고 애썼지만, 지은의 내면에서는 끝나지 않은 무언가가 아우성치고 있었다.
" 괜찮아... 괜찮아. 악몽이었을 뿐이야. 깨어났잖아, 그럼 됐어. 그럼 된 거야. 다 끝났어. "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오는 몸을 그러쥐며 가슴속을 파고드는 냉기를 밀어내려 애를 썼다. 마치 주문처럼 되뇌던 말은 공허한 울림이 되어 방 안에서 산화되어 갔다. 공포가 드리운 그림자는 그녀의 발목을 움켜쥐고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지은은 멈추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끝나지 않을 싸움임을 알면서도 스스로를 놓아버리면 남는 것은 허무뿐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 지은 양. 많이 힘들겠지만 이제는 이야기해 줘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
재아의 앞에 앉은 지은은 혼이 빠져 텅 비어 버린 인형 같았다. 전보다 더 넓은 부위에 감긴 붕대는 상처에서 스며 나온 슬픔으로 인해 얼룩이 져 있었다.
" ... 그냥... 악몽을 꿨어요... "
" 어떤 악몽일까요...? "
" ... 아주 지독하고... 끔찍한 악몽이요.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계속 벗어나고 싶었어요. "
지은은 희미하게 떠오르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재아는 차분히, 또 조심스럽게 지은을 바라보았다. 간밤의 지은은 매우 심각했다. 꿈을 꾸고 있었던 건 분명했지만 반쯤 뜬 눈으로 고통스러운 상처를 남기면서도 표정 하나 일그러뜨리지 않았다. 재아는 지은의 심연에 자리 잡은 고통을 뼈저리게 느꼈다. 부름에도 응답하지 않던 그녀는 스스로를 해치며, 막아서는 손마저 거칠게 밀쳐내었다. 약물만으로는 더 이상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기에, 재아는 치료 방법을 두고 깊은 고뇌에 빠졌다.
" 지은 양. 악몽이 단순히 지나가는 게 아니라는 걸 지은 양도 느끼고 있을 거예요. 만일 그 악몽이 지은 양을 계속 붙잡고 있는 거라면 우리가 함께 풀어내야 해요. "
재아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단단했다. 그녀는 지은의 불안한 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듯 잠시 멈췄다. 지은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팔을 감싸 안고 있었다. 마치,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작은 발버둥 같았다. 지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젓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아니에요. 깨어났잖아요. 지금은 기억나지 않잖아요. "
" 그렇다고 해서 끝난 일이 아니라는 건 지은 양도 알고 있지 않나요? "
재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고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음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뒤엉키며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는 상황에 몰아넣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 정말 이 방법밖에는 답이 없을까? '
재아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지은이 기억을 마주하며 겪을 고통이 그녀를 망가트릴까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의 상태를 방치하면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 뿐임을 알았다. 결국 재아는 힘겨운 결단을 내리고는 말을 꺼내기로 결심했다.
" 최면치료라는 방법이 있어요. 억지로 기억을 떠올리게 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최면치료는... 마치 숨은 그림 찾기 같은 거예요. 지은 양의 마음속에 깊이 숨겨진 조각들을 찾도록 도와주는 과정일 뿐이에요. "
지은의 눈이 커다래지며 재아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의구심과 두려움이 한껏 뒤섞여 있었다. 재아는 불안해하는 지은에게 차분한 어투로 설명을 하며 안심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지은의 무릎 위에 놓인 손이 가엽게 떨리고 있었다. 재아는 지은의 떨리는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며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 지은 양, 이건 오롯이 지은 양을 위해서 제안하는 거예요. 지금은 무섭고 혼란스럽겠지만 그 안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어요. 제가 곁에서 지켜볼게요. "
지은은 재아의 손길을 느끼며 자신의 마음속 혼란을 억누르려 애썼다. 기억이 떠오르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재아의 따듯한 말과 손길은 그녀의 닫힌 마음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 정말... 괜찮을까요? "
" 괜찮아요. 지은 양이 감당하기 힘든 순간이 오면 제가 꼭 곁에 있을게요. 절대, 혼자 두지 않을게요. "
재아는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떨리는 손 위에 얹힌 재아의 손에서부터 차갑게 얼어붙은 심장 위로 온기가 전달되었다. 지은은 재아의 따스함에 힘입어 용기를 내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지은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 한 번... 해 볼게요. "
짧은 말이었지만 재아의 얼굴에는 안도와 기쁨이 스쳤다. 지은의 희미한 미소로 재아는 조마조마했던 감정들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 고마워요, 지은 양. 정말 고마워요. 앞으로는 혼자서 다 견디려 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해요. "
그 순간 지은의 눈에서 한 방울씩 눈물이 떨어져 바닥에 작은 얼룩들을 남겼다. 지은은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신에게 한가닥 생명줄이 내려온 것이라 생각했다.
치료를 시작하기로 한 뒤 지은은 평소와는 다른 장소로 안내되었다. 입원을 해 있던 병동을 벗어나며 그녀는 오랜만에 창문 밖이 아닌 직접 마주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드러운 햇살이 지은의 창백한 얼굴에 내려앉았다. 눈이 부시는 반짝임에 살짝 눈앞을 가리던 지은은 무언가 잊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병원 복도를 걸으며 들리던 소음과는 다른, 작은 새들의 소리와 나뭇잎이 스치는 사소한 소리들이 그녀의 귀를 간지럽혔다. 오랜 시간 닫아 두었던 문 너머의 세상을 엿본 듯 두려움과 설렘이 엇갈려 생경하게 느껴졌다. 밝고 화창한 그 모든 것들이 지은에게 낯설게 다가왔다.
" 어서 와요, 지은 양. "
별관 안으로 들어와 잠시 걸었더니 문 앞에서 기다리던 재아가 보였다. 지은은 익숙지 않은 공간에 와서 인지, 자신을 맞이하는 재아를 보면서도 살며시 느껴지는 불안감에 멈칫하였다.
" 여기는 어디...? "
" 앞으로 최면치료는 이 안에서 함께 할 거예요. 아무래도 기존의 상담실은 집중하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지은 양을 위해 특별히 준비했어요. 최대한 지은 양이 편하게 느낄 수 있도록 준비해 봤는데, 어때요? "
지은은 재아의 말에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운 천장에서 흘러내리는 오렌지빛 조명과 깊은 자주색 벨벳 벽이 공간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중앙에는 푹신함이 눈에 보이는 긴 소파 베드와 작은 램프가 올려진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한쪽 벽에는 늘어선 책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묵직하면서도 아늑한 방의 분위기가 긴장하고 있던 지은의 마음을 서서히 풀어주었다. 은은하게 퍼져 있는 우드향은 무겁게 느껴지던 공간의 분위기를 한층 부드럽게 했다. 지은은 조용히 소파에 앉으며 공간이 주는 따듯함에 잠시 위안을 얻었다.
" 여긴... 생각보다 아늑하네요. "
" 다행이에요. 지은 씨가 편하게 있을 수 있길 바랐거든요. "
재아는 미소를 띠며 말했지만 시선은 한결 진지해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