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눈
" 지은 양, 치료를 시작하기 앞서 어떻게 진행될 건지 간략하게 알려줄게요. 최면치료는 무의식 속에 잠자고 있는 기억과 감정을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강렬한 감정이 떠오를 수도 있지만, 제가 곁에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치료는 지은 양의 의지에 따라 진행되며, 언제든 중단할 수 있다는 것. 기억하죠? "
지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재아는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지은이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 천천히 숨을 고르면서 내 목소리에 집중해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그렇지. 잘하고 있어요. "
재아는 지은의 긴장이 채 풀리지 않아 보여 걱정이었지만,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지시에 따라 집중하는 그녀를 유심히 살피며 신중을 기했다.
" 숨을 쉬다 보면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느껴지나요? "
" ... 그런 것 같아요. "
" 잘했어요. 그럼 앞으로 주욱 이어진 길을 따라서 이동할게요. 어두운 길 끝에 작은 문이 보일 거예요. "
" 네. 낯이 익어요. "
지은은 재아의 말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듯 느껴졌다. 물속에 깊이 잠긴 듯, 재아의 목소리가 물결처럼 웅웅 울리며 퍼져 나갔다. 낯익은 문 앞에 선 지은은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두렵게만 느껴졌다.
[ 자, 이제 문을 열고 나가 볼게요. 문을 열었을 때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 줄래요? ]
지은은 문을 열면 무언가 큰일이 날 것 같은 예감에, 문 앞에 멈춰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차마 손잡이에 손을 뻗는 것조차 쉽사리 할 수가 없었다. 지은은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지긋지긋한 악의 고리를 끊고 싶은 열망이 들었다.
' 괜찮아... 이건 꿈이 아니야. '
지은은 눈을 꼭 감은 채, 깊게 숨을 들이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마침내 서늘한 손잡이를 향해 손을 내밀고는 조심스럽게 돌렸다.
끼익-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리며 문이 열렸다. 그때까지도 지은은 눈을 뜨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본가에 있는 자신의 방이었다. 창가로 새어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달빛이 방 안을 은은하게 비추고 푹신한 침대와 늘어선 책장이 익숙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익숙함 속에서도 어딘가 묘하게 생경한 기운이 감돌았다. 지은은 시선은 방 안을 둘러보다 자연스레 침대로 향했다. 잘 정돈된 침대 위, 자신이 본 적 없는 핸드폰 하나가 놓여 있었다.
" 이게... 뭐지? "
[ 지은 양, 무엇이 있나요? ]
" ... 핸드폰... 내가 모르는 물건이에요. "
[ 그렇군요. 지은 양의 기억 속 물건이니까 분명, 그 안에 우리가 찾는 조각이 있을 거예요. 천천히 살펴보세요. ]
익숙한 방 한가운데 놓인 이질적인 존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 든 지은은 꿀꺽, 숨을 삼켰다. 화면을 켜자, 배경화면은 그녀 자신의 사진이었다. 눈부신 햇살 아래, 해사하게 웃고 있는 모습. 순간, 전신을 휘감는 섬뜩함에 지은은 하마터면 핸드폰을 놓칠 뻔했다.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사진을 보며 느껴지는 어색한 위화감에 지은은 의문과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조작해 보았지만 열 수 있는 어플은 단 하나. 갤러리뿐이었다.
" 이건 뭐지? "
지은은 재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긴장에 휩싸였다. 마음은 더 이상은 알고 싶어 하지 말라며, 당장 여기서 멈추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지은은 끝내 떨리는 손 끝으로 갤러리 아이콘을 눌렀다. 화면이 잠시 검게 변했다가, 갑자기 수많은 사진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한 장, 한 장. 사진 속 여자는 얼굴을 가리며 울고 있거나 고통에 휩싸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진을 확인하던 눈동자는 하염없이 흔들렸고 스크롤을 내리는 손가락은 점차 빨라져만 갔다.
" 이, 이건 뭐야? 왜 이런 게 여기 있어? "
[ 지은 양, 그 속에 무엇이 있던 무서워하지 말고 천천히, 하나씩 봐도 돼요.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를 기억해요. ]
재아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지은의 귓가에 닿기 전에 저만치 멀어져 갔다.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넘기던 순간 갑작스레 화면이 멈췄다. 그리고 화면이 마치 영상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면 속 장면이 그녀의 눈앞을 가득 채웠고 지은은 숨을 멈춘 채 어지러움에 끌려 들어가지 않으려 애썼다.
창문 너머로 스며든 서늘한 달빛, 뜨겁고 농밀했던 감촉. 맞닿아 오던 열기와 달큼하면서도 끈적한 숨 내음. 더불어 자신의 위에 엎드려 짓누르던 묵직함과 소름 끼치게 훑으며 지분대던 손길까지. 그녀의 머릿속으로 감춰졌던 그날의 기억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 아... 아니야. 아니야! 제발, 제발 멈춰... "
지은은 자신의 위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민욱과 눈이 마주쳤다.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쳤고 헐떡이는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가 자신의 것인지, 민욱의 것인지 분간 조차 되지 않았다.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고 모든 상황이 비현실처럼 느껴졌다. 야릇하게 달아 오른 몸은 무척이나 나른했고 뭔가에 휩쓸리듯 더 깊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 이, 이 건, 아니야... "
지은은 다가오는 민욱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이상하게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이 떨림은 공포인지, 아니면 그가 가까워졌을 때 느꼈던 불안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 지은아... "
민욱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민욱의 눈동자 사이에 보이는 아련함과 열망이 지은의 몸을 휘감았다. 그는 이미 욕망에 몸을 맡긴 채, 자신의 감정에 취해 이해하지 못할 말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 너는 모르겠지만 오래전부터 너를 좋아했어. 언제부턴가 널 보면 가슴이 뛰고, 닿고 싶고 계속 그래 왔어."
" 참으려고 노력도 해 봤어. 먼발치에서만 보자. 이러면 안 되는 사이니까 정신 차리자. 그런데 네가 이렇게 앞에 있으면 난... 그냥 참을 수가 없었어. "
" 처음 잠들어 있던 널 만졌던 날. 미친 듯이 후회했어. 이러다 네가 날 싫어하면 어쩌지, 볼 수 없게 되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불안해 미쳐버릴 것 같았어. "
" 그렇게 미친놈처럼 술도 마셔 보고 다른 여자들도 만나 보면서 널 잊으려고 했는데, 네가 자꾸 어른거리고 어느새인가 네 소식만 찾아보고 있더라."
민욱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은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그의 말은 그녀의 가슴을 쥐어짜는 듯했다.
" 그, 그렇대도 이 건. 이 건, 아니잖아. 오빠. "
지은의 목소리는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 자신을 지켜봐 왔다는 말도, 꿈이라고만 여겨 왔던 것이 사실이었다는 것도 모두 공포로 다가왔다. 고개를 내 저으며 단호히 말하는 그녀였으나 민욱은 고개를 저으며 더욱 다가왔다. 민욱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입술에 닿으려 했다.
" 지은아, 나도 알아. 이런 내가 잘못 됐다는 거. 근데, 정말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자꾸만 너와 닿고 싶고 너와 같이 있으면 그냥 참을 수가 없어져. 내가 널 너무 사랑하니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이럴 수도 있는 거잖아?"
" 아... 아니야. 아니야, 오빠. 이건 사랑 같은 게 아니야. "
" 이번 한 번만 이해해 주면 안 될까? 너도! 너도... 설레었잖아. 그렇지? 네가 날 보던 눈빛을 보고 알았어. 네 마음속에 나에 대한 감정, 나도 알고 있어. "
민욱은 계속해서 그녀를 설득하려 들었다. 지은은 몰아치는 혼란스러움에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손길은 끝없이 이어져 내렸다. 지은은 설렘이란 단어에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공간에 있으며 두근거리던 것, 그와의 식사에서 느꼈던 다정함들이 모두 설렘이었을까? 그 모든 의문과 혼란을 뒤로하고 지은은 자신을 옭아매는 감각에 굴복하지 않으려 애썼다.
" 멈춰... "
지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뱉었지만 민욱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목덜미에 닿은 입술은 끈적하게 몸을 타고 흘러 얕게 이어진 골짜기를 타고 내려갔다. 입술을 갖다 댄 채 자근거리며 맛을 보던 민욱은, 감질이 났는지 자유로운 손으로 그녀의 잠옷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 괜찮아... 괜찮아. "
민욱은 두려움에 입술을 앙 다문 채 덜 덜 떨고 있는 지은에게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지은을 향한 것인지, 자신에게 향한 것인지는 민욱도 알 수 없었다. 이내 드러난 살결에서 나는 달큼한 살내에 취한 민욱은 거침없이 그녀의 속옷을 밀어 올렸다. 봉긋이 솟아 오른 푸딩 같은 둔덕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푸딩 위에 얹힌 탱글한 열매를 가득 머금으며 소름이 오스스 돋아 있는 살결을 그러 쥐었다.
민욱은 농익은 열매를 빨아들이며 자신의 갈증이 해소가 되기를 바랐지만 타들어 가는 갈증은 더욱 그를 목마르게 했다. 움찔거리며 허리를 비트는 지은을 몸으로 막아내며 맛본 푸딩은 세상 그 무엇보다 감미로웠다. 누군가 평생 맛볼 수 있게 해 준다고 한다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더라도 다른 이에게는 절대 뺏기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계속해서 자신과 떨어지려 하는 지은의 허리를 다리로 감아 고정한 뒤, 그녀를 가리고 있는 실오라기를 벗겨 내었다. 백옥 같은 실루엣이 드러나며 달빛에 반짝이자 민욱은 아랫배가 묵직해져 갔다. 민욱은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지은은 민욱의 행동을 보며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 하아... 너무 아름다워. "
" 싫어...! 안돼, 하지 마...! 제발 그만해! "
민욱은 그녀의 저항을 가볍게 무시하며 힘으로 억누르고 손에 든 핸드폰으로 그녀의 모든 것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찰칵찰칵 반복되는 셔터 소리와 함께 깜빡이는 불빛이 방 안을 채울 때마다 지은은 끝없는 나락 속으로 서서히 떨어져 가는 기분을 느꼈다. 렌즈 너머로 자신을 응시하는 민욱의 날 선 시선이 뇌리에 깊게 박혔다. 마치 그의 눈 속에 갇혀버린 듯 모든 감각이 마비되어 갔다.
' 이건 꿈이야. 현실일 리 없어. 이건 그냥... 악몽일 뿐이야. '
그녀는 현실을 부정하며 어딘가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흘러내리는 눈물과 떨리는 숨은 여전히 자신이 여기 있음을 상기시켰다. 모든 것이 잔혹하고 무력했다. 아무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었고, 외침은 허공 속으로 공허히 흩어질 뿐이었다. 희망이 꺼져가던 순간 그녀는 더 이상 발버둥 치지 않기로 했다.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걸 선택하고 말았다.
렌즈의 시선 속에 갇힌 자신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차가운 껍데기만 남아, 마치 마네킹처럼 가만히 눕혀졌다. 의식은 점점 가벼워져 떠오르듯 분리되었고, 그녀는 자신의 몸을 멀리서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모든 것이 마치 화면 속 장면처럼 비 현실적으로 다가왔고, 그렇게 지은은 차가운 공허 속에 자신을 흘려보냈다. 렌즈 너머로 담긴 그녀의 모습은 민욱을 더욱 깊은 심연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자신이 담아낸 사진 속 그녀를 보며 짙은 한숨을 뱉었다. 숨길 수 없는 욕망이 그의 온몸을 뜨겁게 달궜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터질 듯 고동쳤다.
" 지은아... "
그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를 향한 갈망과 내내 쌓아온 억눌린 감정이 겹겹이 쌓여 터져 나오고 있었다. 민욱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마주 봤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떨리는 어깨와 억지로 외면하려는 표정을 좇았다. 손끝이 간질거리고, 숨을 삼킬 때마다 타들어가는 갈증이 그를 재촉했다. 성이 잔뜩 나서 묵직해진 곳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듯 얕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 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
민욱의 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속에는 묵직한 조급함과 갈망이 얽혀 있었다. 차가운 그의 손이 굳게 닫힌 철문 같은 다리 사이에 불쑥 침범했다. 지은은 그를 힘껏 밀어내고 싶었지만 온몸이 굳은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미안해, 정말 미안해... "
민욱은 스스로도 조절하지 못하는 감정의 무게에 허덕이며 말했다. 그의 말은 반복되었지만, 사과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결심을 다지는 속삭임 같았다. 그녀의 위로 몸을 기울이면서도 조금함이 느껴지는 손길에 거침이 없었다. 조심스러운 태도는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불안과 욕망이 그를 압도하며 움직임은 점점 거칠어졌다. 마치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그녀를 놓쳐버릴 것만 같은 절박함이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 지은아, 나 정말... 멈출 수가 없어. 최대한 아프지 않도록 할게. "
그의 목소리는 허스키하게 갈라지며 떨려왔다. 지은은 그의 눈빛 속에서 흔들리는 불꽃과 함께 조급함과 광기를 느꼈다. 그들 사이에 차오르던 긴장은 더 이상 멈출 수 없는 강물처럼 흘러넘쳤다. 민욱은 조급한 손길로 가리어진 수풀 사이 동굴을 찾아 나섰다.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이 멈췄다. 허공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단말마처럼 흐릿해졌다. 그러나 미끈거리는 생경한 느낌과 짜릿한 전율은 급작스럽게 밀려 들어왔다.
'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
민욱의 손 끝에서 만들어진 질척이는 소리가 야릇했다. 손가락이 스칠 때마다 미끌거리는 액체가 새어 나왔고, 동굴 위 자리한 작은 버튼은 눌릴 때마다 온몸에 전기를 쏘아댔다. 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은 그녀를 버려진 마네킹으로 끌고 와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손가락을 푹 적실 정도로 액체가 새어 나오자 민욱의 눈빛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작게 흔들렸다.
" 괜찮아, 지은아. 한 번만... 딱 한 번이면 돼. 약속할게. "
그의 말은 저 멀리 희미하게 사라져 갔고 지은의 내면에서 이성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침대 위의 마네킹에 갇혀 버린 그녀는 그저 차갑게 얼어붙어 있기만 했다. 지은은 숨을 멈췄다. 눈을 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눈을 감는 것이 더욱 두려웠다.
' 멈춰야 해. 절대 있어서는 안 돼! '
그의 손길은 급하게 허리춤을 따라 움직였고 천이 스치는 소리가 어두운 방 안에서 더 크게 들려왔다. 벨트에 있는 버클의 마찰음이 방 안의 정적을 깨트리며 공기 속에 긴장감을 흩뿌렸다.
" 하아.... "
민욱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숨소리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거칠고 단절된 그의 숨소리는 마치 조급한 시계태엽이 풀리는 소리처럼 이어졌고 방 안의 공기마저 무겁게 짓눌렀다. 지은은 모든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것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지기를 바랐다. 마치 그 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울려오는 메아리인 양 그녀는 단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기만을 바랐다. 민욱의 손길이 더 깊은 욕망으로 떨릴수록 그녀는 더욱더 자신이 사라져 버리기만을 바랬다.
' 멈출 수 없어. 아무도 이걸 멈추지 않아. 느끼지 않으면 돼. 아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돼... '
생기를 잃어버린 그녀의 눈은 미세하게 떨렸고 흘러내리는 눈물 방울이 귓가에 닿아 작고 서글픈 소리를 냈다. 민욱은 바지를 거칠게 무릎 아래로 흘려보내며 깊은숨을 내뱉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침대가 울렁거렸다. 그것은 마치 방 안을 가득 채운 긴박한 심장의 고동처럼 점차 그녀를 둘러싸며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그 모든 소리와 감각에서 떼어내며, 스스로를 더 깊은 곳에 가두어 현실을 지워나갔다. 차갑게 식어가는 자신을 느끼며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민욱은 자신을 깊고 깊은 동굴 속으로 완전히 내던졌다. 끓어오르던 욕망은 장벽을 부수듯 그들의 마지막 경계를 넘어섰다.
지은은 억누를 수 없는 생경한 고통과 함께 마음속에서 무언가 찢겨나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흘러내리는 눈물 뒤로 붉은 잔영이 그녀의 시야를 채우며 그녀의 마음은 점차 무겁게 가라앉았다. 민욱의 눈 속에서 쾌락과 경이로움이 교차함과 동시에 그녀는 자신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지은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민욱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속에는 욕망과 만족, 그리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무언가가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지은은 그것을 바라볼 수 조차 없었다.
' 이건 내가 아니야. 이건 현실이 아니야. '
머릿속은 이미 새하얗게 비워졌고 낯선 공허 속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천장을 향해 고정되었다. 얇은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이 방 안을 어렴풋이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 희미한 빛조차도 그녀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침묵 속에 더 깊이 가라앉게 하는 것이었다.
민욱은 그녀의 가냘픈 몸을 감싸며 숨을 고르려 했지만, 들끓는 욕망은 그의 몸을 거칠게 이끌었다. 그는 손끝으로 그녀의 피부를 어루만지며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온 방이 그들의 숨소리로 가득 찬 것 같았다. 민욱은 그녀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속에는 멈출 수 없는 짙은 갈망이 담겨 있었다.
" 지은아, 정말로 사랑해. 이제 넌 내 거야. 넌 내 거야.... "
그의 말은 무거운 공기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산화되어 지은의 귀에 와닿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처럼 허공에서 흩어져 갔다. 민욱은 그녀와 이어짐과 함께 자신을 덮쳐오는 쾌락과 죄책감의 이중주에 휘청이며 몸을 맡겼다. 죄책감은 파도처럼 그를 삼키려 했지만 욕망의 불길은 더 높이 제 키를 키워 갔다.
" 지은아... 지은아! "
그는 눈을 감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의 밑에서 오롯이 전부를 드러내고 있는 그녀를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고양감에 조금 더 오랫동안 그녀와 이어져 있기를 바랐다.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 내는 축축한 소리와 끝없이 흘러내리는 땀방울들은 진득하게 고여 방 안에 쌓여갔다. 비릿한 혈향과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들이 섞이며 두 사람의 정신을 저 멀리 어딘가로 흘러가게끔 했다. 지은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 애썼다. 주변을 가득 채우는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자신을 나락의 끝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맴돌았다.
' 조금만 더 버텨. 조금만 더 버티면 모든 게 끝날 거야. '
방 안을 가득 채운 체향들로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을 느끼던 민욱은 이내 몸 안에서 터질 것 같은 뜨거움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움이 길을 따라 솟구치면서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벽에 금이 가는 것 같았다.
" 하악... 하악...! "
벽이 무너져 내릴 것처럼 아슬아슬한 느낌에 민욱은 두드리는 망치에 더욱 힘을 가했다. 속도를 높여가며 벽에 수차례 망치를 내리꽂자 정수리 끝까지 차고 오르는 희열감이 몸을 관통했다. 마침내 민욱은 절정의 순간을 맞이하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자신을 가득 채웠던 감정과 욕망을 그녀에게 와르르 쏟아냈다. 방 안을 가득 채우던 농염한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고 달빛마저 서서히 빛을 바라가고 있었다. 지은은 자신의 안을 뜨거움으로 가득 채운 그의 욕망 덩어리를 느끼며 마음속 어딘가에서 파사삭 부서져 나갔다. 민욱이 무너트려 버린 커다란 벽은 그녀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그녀의 심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