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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yes

숨겨진 눈

by Gin

#9.




" 지은 양! 돌아와요! 제 목소리를 들으세요! "


재아는 떨리는 손으로 지은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지은의 얼굴은 마치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처럼 고통과 혼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지은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며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에는 공포가 어렸다. 그녀의 표정은 깊은 심연 속으로 더욱 가라앉고 있는 것 같았다. 재아는 차오르는 죄책감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 내가 이 치료를 권하지 않았더라면... '


지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본 재아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 지은 양! 이건 기억일 뿐이에요. 현실로 돌아와야 해요! "


재아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퍼져 나갔지만 지은의 의식은 여전히 그 깊고 어두운 심연에 갇혀 있었다. 지은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버렸고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메마른 입술은 미세하게 열렸다.


" 아... 아니야... 안 돼... "


재아는 너무도 작게 새어 나온 그녀의 말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고통이 점점 선명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마치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듯 지은에게 외쳤다.


" 지은 양 돌아와요! 제 목소리를 들어야만 해요! "

지은은 몸을 한 번 격렬히 떨더니 갑작스레 눈을 떴다. 무엇을 본 것인지 그녀의 눈동자는 흐려져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한참 재아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서 주르륵 한줄기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 전부... 다 봤어요. 이제... 다 기억났어요. "


지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속에는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 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후회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지은의 아픔을 위해 선택했던 치료였것만. 자신으로 인해 끔찍한 기억을 다시금 겪었을 지은을 생각하니 의사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인가 자괴감이 들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지은은 노을이 가득한 병실 안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그녀의 꿈은 반복적으로 과거의 그날로 지은을 데리고 갔다. 꿈속에서 느껴지는 숨 막히는 무게와 메마른 울음소리는 현실에서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재아는 창 밖에서 미끄러져 들어오는 어둑한 붉음 속에서 지은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지은의 어깨는 공포에 물들어 들썩이고 있었고 그녀의 눈은 텅 빈 공동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 지은 양. 식사를 좀 하셔야 해요. "


재아는 부드럽게 말을 걸었지만 껍데기만 남은 듯한 지은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핏기가 사라진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속삭임이 재아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 꿈이 아니야... 꿈이 아니었어. "


재아는 지은에게로 천천히 다가가 건들면 부서져 내릴 것 같은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재아는 눈앞에 있으나 없는 것이 되어 버린 지은을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병원에 걸었던 전화 한 통이 초래한 것은 서로를 향한 분노와 날 선 비난이었다. 면회가 금지된 지은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걸었던 전화는 집안에 커다란 폭탄을 떨어트렸다.


[... 현재 강지은 양에 대한 치료 결과가 매우 안 좋습니다. 의식 깊은 곳으로 지워버렸던 기억이 원인으로 파악되어 최면 치료를 진행했으나 강한 충격으로 인해 현재 마음이 완전히 죽어 버린 것과 같은 상황이 되었어요. 자세한 부분은 병원으로 오셔서 직접 들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 이게 다 민욱이 때문이잖아요! "

" 그럴 리가 없어. 우리 민욱이는 그런 애가 아니라고! "

" 뭐가 아니에요? 민욱이 때문이 아니면 왜 우리 지은이가 이렇게 된 건데요! "

" 둘 다 말 조심해! 당신도 그만하고! "

" 상황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당신은...! "

" 오빠나 가만히 있어! 나 참,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어린것이 얼마나 천박하고 싸게 굴렸으면 내 아들이 그랬겠어? 지가 먼저 다 벗고 달려들었을지 누가 아냐고! "

" 뭐, 뭐라고요? "

" 그만들 좀 하라고! 밖에서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들 이래! "

" 내 새끼가... 내 새끼가 마음이 죽어 버렸다잖아! 당신은 애가 망가졌다는데 어떻게 그래요? 민욱이 그 아이가 우리 딸을 망가뜨렸다고요! "


지은의 엄마는 울분을 토해내고는 흐느끼며 무너져 내렸고 거실에서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지은의 아버지는 분노를 가라앉히려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깊은 한 숨을 내 쉬었다. 민욱의 엄마는 끝까지 자신의 아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것에 화를 참지 못했다. 그때 집 현관문이 열리며 민욱이 들어왔다. 민욱은 거실에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며 흠칫 놀라 잠시 뒷걸음질 쳤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안으로 들어섰다.


" 큰 아빠.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어, 엄마는 왜 여기에? "

" 민욱아 잘 왔다! 네 큰 엄마라는 사람이 너한테 뭐라는 줄 아니? 기가 막혀서 정말! "

" 네가... 네가 우리 딸을 망가뜨렸어! "

" 그게, 저는...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


지은의 엄마는 민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주저앉은 채 고개를 들어 민욱을 보며 소리쳤다. 민욱은 그녀의 말에 움찔했지만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려 했다. 그러나 말을 잇기도 전에 지은의 아버지가 분노 어린 목소리로 날카롭게 물었다.


" 네가 뭐라고 하든 중요치 않다. 우리 지은이가 병원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다만 지은이를 그렇게 만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건지는 정확히 해야 하지 않겠니? "

" 병원... 지은이가 병원에 있어요? 왜? 아니, 어느 병원이요? "

" 지금 그게 중요해? 너 때문에 내 딸이 지금 다 죽어가는데! "


울부짖는 지은의 엄마의 말에 민욱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한순간 숨을 멈춘 듯 멍하니 섰다가 이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어머니가 따라 나오며 그를 잡으려고 소리쳤지만 그는 이미 어딘가로 사라진 뒤였다. 민욱은 힘들게 지은이 있는 병원을 수소문했다. 병원 복도를 달려가며 숨을 몰아 쉬던 민욱은 그녀가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듣는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오를 때마다 미칠 것만 같았다.


재아는 지은의 부모와의 통화 이후로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식사에 손도 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의 병실을 찾는 길, 병원 복도를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강지은! 지은아 나와 봐! 어디 있어? "


재아는 화들짝 놀라 병실로 달려 들어가서 살며시 문을 닫았다. 병실 밖에서는 민욱이 보안 요원과 실랑이를 벌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 지은아 제발!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얘기하자고! "


재아는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문을 닫아걸며 돌아 섰다. 어느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지은을 보고는 문득 느껴지는 기시감에 재아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 지은 양. 지금은 저 사람을 만나선 안 돼요. 지은 양에게 더 큰 상처가 될 거예요. 지금은 내가 상대할 테니까 지은 양은 병실 밖으로 절대로 나오지 말아요. "

" 아뇨... 제가 갈게요. "

" 지은 양! 지금 저 사람과 마주하면 상태가 더 악화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

" 아뇨, 괜찮아요. 이건... 이건 제가 끝내야 할 일이에요. "


지은은 무슨 생각인지 텅 빈 상태로 재아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재아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지은은 자신을 막아 세우는 재아를 지긋이 보았다. 너무도 평안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그 속에 온기라고는 모래 한 점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재아의 옆을 지나쳐 문을 열고 나서는 지은의 모습은, 그 어떤 감정도 그녀에게 닿을 수 없는 진공의 상태와 같아 보였다. 밖으로 나오는 순간, 긴장감이 감도는 병원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한 남자가 안전요원들과 대치하며 격한 몸짓으로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 민욱이었다. 그의 얼굴은 초조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그의 이마에 들러붙어 있었다.


"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

" 이거 놔! 지은이를 만나야 한다고. 지은이 내놓으라고! "


지은은 그의 모습을 보며 순간 멈칫했다. 그녀의 시선이 민욱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동안 민욱은 마치 감각적으로 그녀를 알아차린 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눈이 그녀만을 오롯이 담아내었다. 거세게 반항하던 민욱은 갑자기 멈춰 섰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정적 속에서 그는 그녀를 눈 속에 가두느라 정신이 없었다. 흔들리는 그의 눈에는 안도와 격정이 뒤섞여 있었다.


" 찾았어... 드디어, 드디어 내가 널 찾았어. "


지은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복도에 울려 퍼졌지만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민욱의 몸짓 하나하나가 마치 그녀를 붙잡아 두려는 덫처럼 보였다. 민욱은 지은을 향해 한 발 내디뎠다. 안전요원들이 그를 막으려 하자 지은이 손을 들어 올려 신호를 보냈다.


" 괜찮으시겠습니까? "

"... 괜찮아요. 단 둘이 이야기할게요. "


요원들은 주저하며 물러섰고 민욱은 한숨을 몰아쉬며 막아선 요원들을 날카롭게 쳐다 보고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 지은아... 드디어 만났어. 시간이 없어, 우리... "

" 따라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면 안 되잖아? "


지은은 차갑게 말하고서는 뒤돌아 걸었다. 민욱은 그녀를 따라 걸으며 냉랭한 그녀의 모습에 기분이 상했지만 한 순간도 그녀를 뒤를 놓치지 않았다. 지은은 옥상 문을 열고 들어섰다.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게 와닿았고 화창한 하늘이 눈 부셨다. 민욱은 불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얕은 원망을 실어 말을 꺼냈다.


" 왜 날 그렇게 밀어냈어? 왜 그렇게 숨었던 거야. 내가 뭘 잘못했길래. "


지은은 유유히 걸어가 난간 옆에 멈춰 서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과거의 반짝임을 찾을 수 없는 차갑게 얼어붙은 공허함만이 자리했다. 그녀는 자신을 원망하려는 그를 바라보며 그들 사이에 현실을 불러들였다.


" 오빠, 이제 그만 놓아줘... 이건 사랑이 아니야. 집착이야. "

" 아니야! 네가 날 피해 숨어 다니는 동안 끝없이 확인했지만 그날, 우리는 사랑이었어. "

" 정신 차려. 언제까지..! "

" 시끄러워! 네 부모님도 그 누구도 우리를 이해 못 해. 우린 둘이서만 행복해질 수 있어. "


민욱은 지은이 불러들인 현실에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는 자신을 향해 공격을 하는 지은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 지은아 내가 다 알아봐 뒀어.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지금이라도 도망치면 돼! 사람들 오기 전에 나랑 같이 가자. 응? "


난간 끝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마치 이미 예정된 길을 걷는 것처럼 단 하나의 망설임도 없이 홀가분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 끝에 실리는 무게감은 오히려 모든 걸 내려놓은 가벼움 같았다.


" 오빠. "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자 지은의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한 올 한 올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마치 허공을 노니는 깃털처럼 부드러웠고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청아해서 투명하게 보였다.


" 사랑은 강요하지 않는 거래. 오빠가 사랑한 건 내가 아니라 오빠 자신일 뿐이야."

" 아니야, 난 널 사랑했어! 널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

" 난 오빠가 원하는 걸 줄 수가 없어. 이미 텅 비어 버려서 아무것도 없거든. 그러니까 이제 날 좀 그만 놓아줘. "

그녀는 처음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고 희뿌옇게 흐릿하기만 했다. 지은의 말은 민욱을 마치 전율처럼 흔들어 놓았다. 그녀를 잃을 것 같은 절박함에 민욱은 거의 울부짖듯 말했다.


" 아니, 그럴 수 없어. 네가 없으면 난... 난 무너질 거야. "

" 오빠는 끝까지 자기감정만 보이는구나. 난 이미 볼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내가 느꼈던 고통도 내가 어디까지 무너져 내렸는지도 전혀 안 보이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이젠 정말로 끝내자 우리. "


차분한 지은의 말은 칼날이 되어 민욱의 마음을 찔렀다. 그는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손이 난간에 닿았다. 금속은 시리도록 싸늘했고 그 차가움이 손 끝으로 스며들었다. 그 차가움 마저 그녀에게는 위로처럼 느껴졌지만 이제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감상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옅게 가린 구름 사이로 비치는 빛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저 빛은 나를 위해 빛나는 걸까? 아니면 이 마저도 더럽혀져 넝마가 되어버린 나를 조롱하는 걸까.


' 그래도 충분히 버텼잖아. 모든 걸 참고 견뎠어. 하지만 더는 무리야. '


그녀는 잠시 고개를 돌려 민욱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어라 소리치며 간절함과 공포에 휩싸여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을 위한 진심을 단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 매일 반복되는 악몽,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모습. 그 목소리, 그 손길, 그 숨소리까지. 이 모든 게 얼마나 더 나를 짓밟아야 끝날까? 이건 사랑이 아니야... 사랑은 이런 게 아니야. '


그녀는 다시 난간 너머로 시선을 옮기며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살며시 느끼고 있었다. 발끝을 난간 위로 천천히 올렸다. 그녀는 눈을 감고 마지막으로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가 페안을 가득 채우는 순간, 벅차오르는 감정에 또르르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 안 돼, 지은아! 거기서 멈춰! 돌아와! "


민욱은 뭔가를 깨달은 듯 고함을 지르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닿지 못한 그녀에게서 미약한 슬픔과 함께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 보였다.


' 안녕, 엄마 아빠. 죄송해요. 그리고... 안녕, 오빠. '


그녀는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었다. 민욱의 시선 속에 마지막으로 선물을 남겨 준 그녀는 그렇게 천천히 공중으로 몸을 맡겼다. 몸이 붕 떠오르자 그녀는 포근함과 동시에 주변을 감싸는 고요를 느꼈다. 순간이 길게 늘어진 듯한 정적 속에서 그녀의 모습만이 난간 너머로 가벼이 사라졌다. 지은이 사라진 공간을 멍하니 바라보던 민욱은 무릎이 꺾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손은 허공을 움켜쥐려 애썼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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