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눈
" 왜... 도대체 왜? "
절규하는 그의 목소리는 갈라졌고 머리를 움켜쥐는 그의 손가락이 울분에 감겨 떨려 왔다. 그를 짓누르는 죄책감은 무게를 더해져 갔고 지은의 마지막 미소가 그의 눈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속 한켠에서는 여전히 현실을 부정하려는 집착이 꿈틀댔다.
" 아니야. 이런 걸 원했던게 아니야! "
그러나 그 순간, 그의 손바닥 사이로 흘러 내리는 그녀의 흔적같은 공허함이 그를 집어 삼켰다. 그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있었으나 없어져 버린 그녀의 자리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은이 민욱의 눈 속 감옥에서 풀려나 평온을 향해 발을 몸을 맡기던 시각. 재아는 병원 복도를 빠르게 내달렸다. 그녀의 뒤에는 지은의 부모님과 민욱의 엄마가 뒤따랐다.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들은 다급한 발걸음과 불안한 숨소리를 내며 옥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해... 제발 지은 양! '
재아는 밀려드는 불안감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운 옥상 문 손잡이를 단단히 잡았다. 무거운 문을 밀어냄과 동시에 안에서 들려오는 민욱의 목소리가 그녀를 막아 세웠다. 그의 울부짖는 목소리는 절박함과 광기로 뒤섞여 있었다. 순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자신이 늦어 버렸다는 절망감에 등골이 오싹했고 아직은 아닐거라며 부정을 하면서 온 힘을 다해 문을 밀어냈다. 문이 열리자마자 드러난 것은 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있는 민욱이었다. 그는 허공을 바라본 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난간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의 몸은 사시나무가 떨리듯 흔들리며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 왜 그런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 아니, 아니야! 지은아 돌아와.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
민욱은 혼잣말처럼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슬픔과 공포 그리고 광기가 뒤섞여 혼돈 속에 빠져들어 있었다. 지은의 부모님은 뒤 따라오다 멈칫하며 그 장면을 바라 보았다. 지은의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고, 그녀의 아버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굳은 표정으로 민욱을 노려 보았다.
" 지은이... 우리 지은이는요? 선생님 우리 지은이 어디 있어요?! "
" 어머님, 일단 진정 하시고... "
그 때, 아래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병원의 정적을 찢었다. 곧이어 무언가 무겁고 단단한 것이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쿵.
옥상에 자리한 모두의 심장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재아는 온 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갔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들려온 소리의 답을 찾아내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들려 오는 비명 소리들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옥상 아래 저 바닥에서는 찢어지는 비명들과 함께 어수선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소름 끼치게 전해졌다. 지은의 아버지는 고개를 떨구고 주먹을 쥔 채 아무 말 없이 난간으로 다가섰다.
그의 등은 자책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민욱의 어머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욱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혼자서 중얼거리며 돌아오라고 되풀이만 하고 있는 아들을 붙잡으며 흔들었다.
" 이, 이게 무슨 소리야? 아니지? 아니지, 민욱아? "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손 끝은 두려움에 덜 덜 떨렸다. 그녀의 표정은 절망과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민욱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난간 너머 지은의 환영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냐고! 대답 좀 해봐! "
그의 입술은 열려 있었으나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 앞을 떠도는 마지막 그녀의 순간만을 좇으며 그저 돌아와 달라는 말 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민욱은 마치 그녀가 그 아래에서 대답해 줄 것처럼 속삭이며 산산 조각난 마음을 주어 모으고 있었다.
' 지은 양. 도대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 거예요? '
재아는 날카로운 비명과 무거운 충격음이 전해지던 아래쪽을 향해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난간을 붙잡고 아래를 내려다 보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지은의 몸은 흉측하게 뒤틀린 채 차가운 땅 위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얼굴의 반쪽은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고, 손 끝은 마지막 순간까지 무엇인가를 붙잡으려 한 듯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잠든 표정은 지은을 봐왔던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재아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숨 조차 쉬기 힘들 만큼의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러 오며 그녀의 아픔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자책감이 밀려 들었다. 난간을 쥔 재아의 손이 새하얗게 바래지며 파르르 떨려왔다.
' 조금만... 아주 조금만 나에게 이야기 해주지 그랬어요.미안해요. 내가 붙잡았어야 했는데. 내가 더 일찍 알아 차렸어야 했는데! '
재아가 자신을 자책하며 고통스러워 하는동안 민욱의 마음 속에서는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민욱은 갑자기 일어나 실소를 하더니 정신 없이 뛰어가 난간을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눈은 아래를 향했지만 초점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몸 전체가 떨리고 마치 공기가 그를 조이는 듯 숨 소리마저 끊어질 것처럼 미어졌다.
" 내가... 내가 널 이렇게 만든 거야? 정말로? "
민욱은 울부짖으며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자신의 눈 속에 담았던 그녀와의 모든 기억들이 돌이킬 수 없는 칼날처럼 그를 깊게 쑤셨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자기 얼굴을 쓸어 내렸다. 거칠게 몰아 쉬던 숨이 차츰 잦아 들더니 그 자리에 차가운 침묵이 내려 앉았다.
" 하, 하하... 미쳤어. 그냥 내가 미친 거였어! "
민욱의 목소리는 이제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 조소를 띄우며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눈빛으로 손을 바라 보았다. 재아는 민욱의 조소 소리가 너무도 슬프게 느껴졌다. 지은을 잃었다는 비통함과 결국 그녀가 생을 등지게 만들어 버린 민욱을 향한 원망이 들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귓가에 스며드는 민욱의 속삭임은 너무도 아프고 한없이 슬펐다.
재아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는 넋이 나가버린 모두를 바라 보았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지은을 지키지 못한 죄책함과 자멸감에 무너져내려 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 중 지은의 마지막 모습과 같이 소멸되어 가고 있는 민욱을 향해 어렵게 입을 열었다.
" 한민욱 씨. "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먼지가 되어 공중에 날아가 버릴 듯 자신을 모두 소진하고 있던 민욱의 눈은 아무것도 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깨져버린 카메라 렌즈처럼 민욱의 눈동자는 그 무엇도 담으려 하지 않았다.
" 정신 차려요. 당신이 지금 무너져 버리면 안돼요. "
민욱은 슬픔과 죄책감이 뒤섞인 희뿌연 눈동자로 재아를 바라 보았다. 자신에게 말을 건내는 재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바라만 보았다.
" 치료 받아요. 치료 받으면서 괴롭고 힘들더라도 살아요. 그게 지은 양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에요. "
" 용... 서... "
" 그래요 용서. 지은 양은... 아픈 선택을 했지만 그녀가 끝내 끊지 못한 고통을 끊어줄 수 있는 건 이제 당신이에요. "
" 치료 받으면... 모든 게 끝날까요? 제가... 제가 할 수 있을까요? "
" 내가 도울게요. 지은 양의 끝은 지켜 줄 수 없었지만 이번엔 꼭 끝까지 함께 할게요. "
재아는 주저 앉은 민욱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민욱은 내밀어진 재아의 손을 한참을 쳐다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았다. 민욱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떨리는 손으로 내밀어진 재아의 손을 잡았다. 그것은 약속이었다. 떠나간 지은에게,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지옥을 끝내기 위한 첫 걸음이었다. 그가 잡은 손은 차갑지만 단단했으며, 그 안에는 생의 희미한 불씨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은의 어머니는 쏟아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얼굴은 절망과 비통함으로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 이제 와서 뭘 한다고? 우리 딸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치료를 받겠다고! 네가 용서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
지은의 어머니는 숨을 몰아 쉬며 주먹을 움켜 쥐었다. 그 눈물 어린 눈동자에는 깊은 절망과 원망이 담겨 있었다.
" 얼마나 외로웠을 거야... 얼마나 괴로웠겠냐고! 그런데 이제와서 치료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는데! "
그녀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민욱을 붙들고서 슬픔을 쏟아내는 그녀의 곁으로 지은의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주름은 더욱 깊어져 있었다.
" 여보... 그만합시다. "
" 그렇지만! "
" 제발... 그만하자! 응? "
그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아내를 달랬다. 그의 말에 지은의 어머니는 흐느끼며 어깨에 기대었다. 흐르는 눈물은 닦지도 못한 채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민욱의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굳어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의 아들은 잘못이 없다는 생각과 아들이 병 들도록 내버려 두고 지은의 탓만 해왔던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깊은 후회에 잠겼다. 수많은 부정 속에서도 그녀는 결국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민욱의 손을 잡은 재아의 모습을 바라 보며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 미안하다... 미안하다, 지은아. 내가 미안해. "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저지를 잘못과 오롯이 마주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에 흩날리는 듯 작았고 울음 섞인 떨림 속에 눌러 담긴 후회가 스며있었다. 재아는 민욱의 손을 꼭 쥐고 모두를 차례대로 바라 보았다. 지은이 살아 있을 때, 여기 있는 그 누구라도 그녀를 제대로 바라 보았다면 어땠을까. 바스라져 가던 지은을 단 한 사람이라도 잡아 주었다면 현실은 다르게 흘러가고 있지 않았을까.
재아는 마지막으로 옥상의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새파란 하늘에 서서히 비치는 금빛 물결이 마치, 흘러가는 바다 위의 윤슬처럼 반짝거렸다. 지은의 흔적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물결처럼 퍼져 나가며 조용히 살아 숨 쉬는 것만 같았다.
' 지은 양. 당신이 남긴 아픔들을 헛되게 하지 않을게요. 다시는 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끝까지 곁에서 잘 지켜낼게요. '
" 그러니까 이제는 편히 쉬어요. 안녕, 지은 양. "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