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진 눈동자
" 이제야 결심이 서신 걸까요? "
재아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예전과 다르지 않은 목소리, 그러나 더 이상 위로를 품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말 끝에는 희미한 체념이 걸려 있었다. 민욱은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만큼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쓴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창가로 내려드는 겨울 햇빛이 민욱의 옆으로 얕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방 안의 공기는 상쾌했지만 그 맑음이 가슴속까지 닿아 오는 일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선 다시 들지 않았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 결심이라... "
그는 무의식적으로 말을 되뇌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여기 앉아 있는 이유를 알고 싶은 것일까? 자신의 죄를 바로 잡고 이 지옥을 끝낼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일까?
" 한 민욱 씨. "
재아가 부르는 소리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방 안에서 울리는 그의 이름은 죄목이 되어 짙은 안개가 되었고 굽은 어깨 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담담함과 더불어 날카로운 아픔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을 눈앞에 둔 듯 초조함 또한 묻어 나왔다.
" 그게... 그렇게 쉬운 건가요? 결심... 같은 거요. "
한숨을 통해 터져 나온 질문은 자조가 섞인 한탄이었다. 낮게 갈라져 나온 그의 목소리는 낯설고 선뜩했다. 재아는 적어도 비난을 하거나 동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들여다 보이는 눈빛 속에는 오래된 아픔과 함께 원망이 뒤섞여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것인지 아니면 그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서로 마주한 눈동자에 일렁이는 파도는 쉬이 잠잠 해지지 않았다.
" 결심이라. "
재아는 민욱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진실을 바랐다. 하지만 결심이란 말속에 담긴 의미는 그가 깊이 깨닫기엔 너무나 버거웠고 무거워 보였다. 민욱은 이곳으로 발길이 향했던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왔다. 와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야 이 혼란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될까요? "
" 힘든 여정이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민욱 씨가 자기 자신을 제대로 마주해야만 이 상담을 끝마칠 수 있어요. 천천히 해도 좋으니 먼저, 민욱 씨가 지은이를 처음 만났던 때부터 시작해 보죠. "
재아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자신을 마주 보며 곧은 눈빛을 건네어오는 그에게서는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민욱은 재아의 말을 듣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손끝이 잘게 떨려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무릎을 움켜 잡아야 했다. 민욱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힘겨운 첫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지은의 납골당으로 향하는 길은 끝없이 길고도 힘들었다. 반 년동안 가지 않으려고 피하기만 했던 현실을 밟아 나가며 민욱은 발목을 옥죄는 느낌에 발을 질질 끌었다. 한 해의 반이 지나도록 멈추지 않았던 원망과 죄책감은 그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다. 현실이었으나 현실 같지 않았던 지난 시간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도 괴로웠다. 그러나 마지막 인사를 전할 자격조차 없다는 생각은 현실도피였고 자기기만일 뿐이었다.
창백한 대리석 벽이 끝없이 이어지는 공간. 유리문 뒤에 정리된 유골함들은 슬픔의 시간을 봉인해둔 듯 고요한 침묵 속에 놓여있었다. 누군가는 소박한 꽃다발을, 누군가는 빛바랜 작은 사진을, 또 누군가는 기억을 담은 편지와 장난감을.
그런 흔적들 사이로 그의 시선은 [ 故 강지은 ] 이라는 굵은 글자에 멈췄다. 단아한 유백색 유골함은 아무런 꾸밈없이 공허했다. 사진 한 장 조차 없는 작은 공간은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닮아 있었다. 공중에 홀로 흩어진 잔상처럼 아무런 흔적도 없이.
한 걸음 또 한 걸음. 몸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마음은 뒤로 도망치고 있었다. 유리문 끝에 닿은 손 끝에 차갑고 매끈한 감촉이 스미며 그의 몸을 뒤흔들었다. 온 세상이 멈춘 듯 고요했지만 귓가에는 숨죽인 울음 만이 맴돌았다. 그것은 심연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소리였다. 목구멍 깊은 곳에 가라앉은 울분과 비명이 끝내 새어 나오지 못하고 가슴을 긁어내었다. 짧고도 간결하게 적힌 이름자가 이토록 두렵게 느껴질 줄이야. 굵은 글자들은 그의 잘못과 비겁함을 고스란히 흑색으로 담아내었다. 유골함은 침묵 속에서 그를 조롱하듯 귓가에 원망을 흘렸다.
[ 너 때문이야. ]
그 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마음을 에는 듯 선명히 파고들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바라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땀방울처럼 보였던 흔적이 창백한 뺨을 타고 흘러내렸던 모습, 끝내 모든 것을 놓아버린 그녀의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은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머리가 터질 듯 아파왔고 목을 조이는 고통은 숨조차 앗아갔다.
" 왜 그래야 했던 거야? "
민욱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가 세상에 몸을 던진 후로 그녀를 원망했던 모든 시간들에 대한 자책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생각할수록 자신의 비겁함이 모든 시작이었다는 생각에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물 번짐처럼 흘러가는 기억 속 떠오른 한 사람. 차가운 눈빛으로도 끝까지 손을 내밀었던 재아였다. 흐린 기억 속 맞잡았던 손의 감촉은 생생했지만 그는 아직도 손을 잡을 자격이 있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민욱은 영면에 든 지은을 앞에 두고도 갈팡질팡 하는 마음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녀에게 전할 수 있는 마지막 인사가 무엇일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더 큰 비겁함이 될 것이기에 천천히 떨리는 입술로 참담함을 건네었다.
" 미안해... 지은아. "
무겁고도 참담했다. 닿을 수 있을지 조차 알 수 없는 인사를 읊조리 듯 건넸다. 힘들게 소리를 뱉어낸 순간 마음속에서 거칠게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사과와 동시에 참회의 길 위에 서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