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모든 행복한 사진 속에는 아빠가 있었다.

딸의 밑바닥에 깔리는 가장 단단한 정서적 지붕

by 작가 희와이

사람의 기억은 때로 연속된 영상이 아니라 찰나의 장면, 즉 ‘사진’으로 남는다고 한다. 내 머릿속 앨범 가장 깊은 곳에는 유독 선명하게 인화된 사진 몇 장이 있다. 인파가 가득한 크리스마스 거리에서 내 손을 놓칠세라 꼭 맞잡았던 아빠의 커다란 손, 그리고 당연히 아무도 못 올 줄 알았던 학예회 무대 위에서 봤던 나보다 더 간절하게 노래를 따라 부르던 아빠의 다정한 얼굴. 그리고 길을 걷다가 성장통이 와 다리가 아프다 하면 말없이 등을 내어주던 아빠의 넓은 등. 그 등 너머로 바라보던 세상은 내게 가장 안전한 우주였다.


나는 어릴 때 지독한 ‘아빠 껌딱지’였다. 아빠가 산에 가면 산으로, 시장에 가면 시장으로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아빠의 등 뒤로 보이던 세상은 참으로 따뜻했다.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사춘기라는 폭풍우는 피해 갈 수 없었다. 오히려 너무 가까웠던 탓일까, 우리는 남들보다 더 치열하게 부딪혔다. 아빠는 자신의 품 안에서 작기만 하던 딸이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서려는 모습이 낯설고 서운했을 것이고, 나는 나대로 아빠라는 거대한 울타리를 넘어 세상으로 나가는 법을 배우느라 날이 서 있었다. 아빠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 내 독립의 증거라도 되는 양 심술을 부리던 날들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 우리는 안다. 성별의 차이와 성향의 다름으로 인해 결국 딸들은 엄마와 더 많은 ‘말’을 나누게 된다는 것을. 친구와 싸운 이야기, 새로 산 옷 이야기 같은 시시콜콜한 일상은 엄마의 영역이 된다. 반면 아빠와 나누는 대화는 어느덧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 "준비하는 일은 잘 되냐" 같은 묵직하고 건조한 주제들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아빠와 딸 사이에는 공유할 수 있는 언어보다 공유할 수 없는 침묵이 더 길어지는 시기가 반드시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와의 유대감이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단단하게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해답은 결국 ‘어릴 적 추억’에 있다. 내 주변을 봐도 아빠와 유독 사이가 좋은 친구들은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다. 영유아기부터 사춘기가 오기 전까지 아빠와 보낸 절대적인 시간이 많았다는 점이다. 내 경험상 이 법칙은 거의 100%에 수렴한다. 아빠가 나를 위해 써준 그 시간은 단순히 같이 놀아준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딸의 인생 밑바닥에 깔리는 가장 단단한 정서적 지붕이다.


엄마의 사랑이 매일 아침 나를 일으켜 세우는 ‘말의 갑옷’이었다면, 아빠와의 추억은 내가 세상으로 나아갈 때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좋다는 안도감을 주는 ‘마음의 뿌리’였다. 아빠가 만들어준 기억의 조각들은 딸이 성인이 되어 거친 세상을 만났을 때,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않게 만드는 힘이 된다. '나는 이렇게 사랑받았던 존재'라는 무의식적인 확신이 인생의 풍파 속에서 방파제가 되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딸을 가진 주변의 아빠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한다. 지금 딸과 보내는 1시간이 훗날 딸이 겪을 수십 년의 외로움과 방황을 이겨낼 평생의 자산이 된다고. 가장 예쁘고 당신을 잘 따를 때, 그 기억의 저축을 충분히 해두라고 말이다. 지금 아빠가 내어주는 손바닥의 온기가, 훗날 딸이 홀로 차가운 세상을 버텨낼 때 체온을 유지해 줄 유일한 연료가 될지도 모르니까. 딸의 인생에서 아빠가 심어준 사랑의 기억은 폭풍이 불어 잎이 지고 가지가 꺾여도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거대한 뿌리가 된다.


<아빠한테 보내는 뒤늦은 편지>

아빠, 기억나? 내가 어릴 때 아빠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그 시절 말이야.
문득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하나씩 꺼내 봤는데, 신기하게도 그 모든 장면 속에는 항상 아빠가 있더라고.

사람들이 가득했던 크리스마스 거리에서 내 손을 꼭 잡아주던 아빠의 온기, 학예회 무대 아래서 나보다 더 열심히 노래를 따라 부르던 아빠의 표정. 그리고 다리가 아파 칭얼거리던 나를 업어주던 아빠의 단단한 등. 그때 아빠가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과 내게 내어준 체온이, 훗날 내가 세상의 시선 앞에서 흔들릴 때마다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됐어.

사춘기 시절, 아빠랑 참 많이도 싸웠지. 그때 아빠가 서운해했던 게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가. 아빠는 그저 나랑 예전처럼 친하게 지내고 싶었을 뿐인데, 나는 그게 독립인 줄 알고 날을 세웠던 것 같아. 미안해 아빠. 그래도 아빠, 내가 엄마랑 더 많은 수다를 떨고 아빠랑은 가끔 서먹한 대화를 나눠도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는 항상 아빠가 만들어준 그 따뜻한 사진들이 있어.

내가 힘들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건, 아빠가 정성껏 채워준 그 사랑의 기억들 덕분이야. 아빠가 내 곁에서 그런 소중한 순간들을 만들어줘서 정말 고마워. 아빠가 믿어준 대로, 나는 이제 아빠의 손을 놓아도 혼자서 씩씩하게 걸을 수 있는 단단한 어른이 됐어.

그때 아빠가 나를 꼭 잡아주었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아빠의 손을 잡고 걸을게.
고마워, 아빠. 그리고 정말 사랑해.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