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뜨거운 가슴에서 나온 말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는가
초등학교 2학년, 나의 세계는 발밑에 있었다. 등굣길의 보도블록 틈새, 누군가 떨어뜨린 사탕 껍질, 신발 코끝에 묻은 흙먼지. 나는 늘 고개를 푹 숙인 채 땅바닥만 보며 걷는 아이였다. 남들보다 유독 수줍음이 많았던 탓일까, 아니면 세상이라는 커다란 풍경이 주는 위압감을 견디기 힘들어서였을까. 모임에 가도 엄마의 옷 끝자락을 생명줄처럼 붙잡고 뒤로 숨기 바빴던 나는, 말 그대로 '그림자 같은 아이'였다.
나는 내가 그렇게 걷는지도 몰랐다. 그냥 세상은 원래 조금 무거운 것이고,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하는 것보다 내 발밑의 안전한 고요함을 지키는 것이 더 편안했을 뿐이다. 9살의 내게 세상은 그저 넘기 힘든 높은 담벼락 같았다.
엄마가 내게 그 '비밀'을 털어놓은 건 한참이 지난 뒤였다. 어느 날 아침, 평소보다 준비가 늦었던 엄마는 서둘러 출근하기 위해 택시를 잡으셨다고 한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접어들 무렵, 엄마의 시선이 창밖 한 지점에 멈춰 섰다. 그곳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무거운 책가방에 짓눌린 듯 위태롭게 발걸음을 옮기는 아이 하나가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알 수 있는 나의 뒷모습이었다.
엄마는 훗날 말씀하셨다. 창밖으로 본 내 모습이 마치 커다란 파도 앞에 홀로 선 조그만 섬 같았다고. 고개를 들면 금방이라도 무언가에 치일까 겁내는 아이처럼, 바닥만 보며 걷는 내 정수리가 엄마의 가슴에 가시처럼 박혔다고 하셨다. "우리 딸이 저렇게 외롭게 걷고 있었구나." 엄마는 택시 안에서 결심하셨다. 내 아이의 고개를 어떻게든 들어 올려 주겠다고 말이다.
그날 이후부터였다.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나서려는 나를 엄마가 돌연 붙잡아 세웠다. 그리고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주문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어.
너에게는 그럴 힘이 있단다. 엄마도, 아빠도, 동생도 너를 너무너무 사랑해.
너는 우리한테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야.
처음에는 그저 생소했다. 매일 아침 반복되는 그 시간이 때로는 귀찮기도 했고, 어색하기만 했다. "엄마, 나 늦어!"라며 투덜대도 엄마는 요지부동이었다.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그 진심을 내 가슴에 새겨 넣을 때까지 엄마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내가 대답을 하든 안 하든 엄마의 '아침 의식'은 지독할 만큼 꾸준했다.
그 간절함이 닿았던 걸까. 아니면 엄마가 매일 아침 넣어준 사랑의 연료가 내 안에서 불을 지핀 걸까. 신기하게도 3학년이 되면서 나의 세계가 변하기 시작했다. 땅바닥만 보던 시선이 서서히 들려 친구들의 얼굴을 향했고, 칠판을 향했으며, 마침내 세상을 향했다. 수줍어 엄마 뒤에 숨던 아이는 어느새 반 친구들 앞에 서서 나를 믿어달라고 말하는 반장이 되어 있었다. 공부에도 재미를 붙였고,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성격이 타고나길 변한 게 아니었다. 내 안에 '나를 지탱해 주는 문장'이 생기자, 세상은 더 이상 무서운 곳이 아니게 된 것이다. 엄마가 쏜 화살 같은 말들이 내 등에 보이지 않는 날개를 달아준 셈이었다. 엄마의 뜨거운 가슴에서 나온 그 말 한마디가 내 인생의 궤도를 바꿨다.
지금도 가끔 삶의 무게에 고개가 숙여지는 날이면, 나는 그때의 현관문을 떠올린다. 나를 붙잡아 세우던 엄마의 따뜻한 손길과 단단한 음성.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그 예언 같은 말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가장 큰 뿌리임을 이제는 안다.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의 간절함은 한 사람의 우주를 다시 쓰게 만든다. 9살, 바닥만 보던 나의 시선을 하늘로 옮겨준 건, 다름 아닌 엄마의 '지독하게 뜨거웠던 사랑'이었다.
<엄마한테 보내는 뒤늦은 답장>
엄마, 기억나?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매일 아침 신발장 앞에서 나를 붙잡고 주문처럼 들려주던 그 말들 말이야. 그땐 솔직히 조금 귀찮기도 했어. 바쁜 아침에 왜 자꾸 나를 세워두고 뻔한 이야기를 하나 싶었거든.
그런데 엄마,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됐어. 출근길 택시 창밖으로 내 뒷모습을 보았던 그날 말이야. 엄마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얼마나 작고 위태로웠을지, 그래서 엄마는 엄마가 곁에 없는 시간 동안 나를 지켜줄 ‘말의 갑옷’을 입혀주고 싶었다는 걸 늦게서야 깨달았어.
엄마가 매일 아침 내 가슴에 새겨준 그 문장들이, 신기하게도 내 구부정한 어깨를 펴게 해줬어. 바닥의 흙먼지만 보던 내 눈이 친구들을 보고, 세상을 보고, 마침내 나 자신을 믿게 만든 거야. 9살의 소심했던 나를 학창 시절 내내 반장이며 부반장을 도맡는 적극적인 아이로 만들고, 지금 이렇게 내 삶을 스스로 개척하는 단단한 어른으로 키운 건 엄마의 그 간절했던 예언이었어.
엄마의 사랑이 내 인생을 바꿨어. 나를 포기하지 않고 매일 아침 붙잡아줘서 정말 고마워. 엄마가 믿어준 대로, 나는 이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됐어.
그때 엄마가 나에게 해주었던 그 말, 이제는 내가 엄마에게 꼭 해주고 싶어.
“엄마는 여전히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멋진 사람이야. 그리고 내가 정말 많이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