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늦은 귀가에는 늘 비누방울 같은 이유가 있다.
회사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직함 뒤로 개인의 삶을 숨긴다. 냉철하게 데이터를 분석하고 무심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곳에 '나' 이외의 존재는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워킹맘, 워킹대디의 그 견고한 벽이 단숨에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아이'라는 아킬레스건이 건드려질 때다.
오늘 오후, 사무실의 고요를 깬 건 옆자리 동료의 거친 숨소리였다. 학원에 도착했어야 할 초등학생 아들이 오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핸드폰을 쥔 동료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이의 행방을 알 수 없는 그 짧은 몇 분 동안, 그는 아마 머릿속으로 세상의 모든 비극을 다녀왔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차 키를 들고 튀어 나가려던 찰나, 아이가 무사히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그제야 그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겨우 숨을 골랐다. "정말 지옥과 천국을 왔다 갔다 한 기분이에요." 억지로 웃어 보이는 그의 얼굴에 서린 피곤함이 유독 짙어 보였다.
그 무너진 얼굴을 지켜보며 내 기억 한구석에 묻어두었던 초등학교 시절의 풍경이 떠올랐다. 나 역시 맞벌이 가정에서 자라며 학교와 집, 학원을 잇는 선로 위를 홀로 달려야 했던 아이였다. 하지만 아이의 세계는 본래 직선이 아니다. 때로는 낮잠의 단잠에 빠져 학원 시간을 통째로 잊기도 했고, 때로는 학교 앞 문방구에 새로 나온 장난감을 구경하느라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기도 했다.
그때는 지금보다 휴대폰이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사실 휴대폰이 생긴 뒤에도 학원에 늦어 혼날 것이 무서워 일부러 엄마, 아빠 전화를 외면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내 행방을 찾으려 학교와 학원 여기저기에 전화를 돌리며 혈안이 되셨고, 마침내 연결된 수화기 너머로 내게 불같이 화를 내셨다. 그때의 나는 그 화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겨우 학원 좀 늦은 것 가지고 왜 저렇게까지 사방에 연락을 하고 나에게 화를 내는 걸까. 내게 세상은 놀 거리 가득한 안전한 마당이었을 뿐이었으니까.
어른이 되어 마주한 동료의 무너진 얼굴을 보니 이제야 그 화의 정체를 알 것 같다. 부모가 자식에게 내는 화는 사실, 공포의 다른 이름이었다. 아이들보다 세상을 더 많이 알아버린 어른들. 이 세상에는 다정한 이웃도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악의와 예기치 못한 사고가 도처에 깔려 있다는 걸 알아버린 나이. 좋은 것만 보고 자라게 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세상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어른이기에 마냥 해맑은 아이의 부재를 단 몇 분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자리에 돌아와 "집에 가면 아이를 단단히 혼내겠다"며 다짐하는 동료에게 나는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아마 길가다 개미 구경을 했거나, 누가 비누방울 부는 걸 터뜨리느라 좀 늦었을 거예요. 저도 그랬거든요. 별 큰 이유 아닐 거예요. 우리 다 그런 경험이 있잖아요."
이 말은 과거의 나를 찾아 헤맸을 나의 부모님에게, 그리고 오늘 내 동료처럼 가슴을 졸였을 모든 맞벌이 부모에게 전하는 뒤늦은 위로였다. 아이들은 죄가 없다. 그저 세상이 너무 신기해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을 뿐이다. 다만 그 멈춘 시간 동안 부모의 심장이 타들어 간다는 사실을, 아이는 아직 모를 뿐이다.
맞벌이 부모 밑에서 혼자 서는 법을 먼저 배웠던 나는, 역설적으로 그 외로웠던 시간 덕분에 타인의 불안을 읽어낼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동료의 옆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의 아이가 보았을 비누방울의 다채로운 색깔을 상기시켜 주는 것뿐이었다. 세상은 여전히 위험하지만, 당신의 아이는 그 위험보다 훨씬 더 빛나는 것들에 잠시 마음을 뺏겼을 뿐이라고. 아이의 무심함은 역설적으로 당신이 만든 세상이 그만큼 안전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