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맞벌이 가정 첫째의 서글픈 연기

혼자 있을 줄 알지만, 혼자 서지 못했던 아이

by 작가 희와이

이 글은 맞벌이 가정에서 일찍이 '의젓한 아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온, 하지만 부모님에게는 차마 보여줄 수 없었던 지독하게 약한 내 모습을 이제야 고백하고 안아주고 싶어 쓰는 기록이다.


어린 시절의 나를 수식하는 단어는 언제나 ‘의젓함’이었다. 맞벌이하시는 부모님 아래서, 나는 학교가 끝나면 텅 빈 집의 도어락 번호를 누르고 익숙하게 거실 불을 켜는 법을 먼저 배웠다. 연로하신 할머니는 한참 어린 동생을 돌보기에도 버거우셨을 테고, 그 때문인지 동생은 주로 놀이방이나 할머니 댁에서 오후를 보냈다. 결국 고요한 집을 지키는 건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부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스스로 숙제를 끝내고, 적막한 공기를 텔레비전 소리로 채우며 시간을 보내는 것. 주변 어른들은 그런 나를 보며 “너는 혼자서도 참 잘하네”라며 대견해하셨다. 하지만 그것은 자발적인 자립이 아니었다.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려야 한다는 첫째의 책임감이 만들어낸, 소리 없는 약속이자 서글픈 ‘연기’였다.


나는 집 안에서만큼은 완벽하게 혼자여도 괜찮은 아이여야만 했다. 부모님 앞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독립적인 아이였던 나는, 이상하게도 집 밖으로 나가는 순간 비슷한 듯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집 안에서 억눌렀던 외로움이 밖에서는 지독한 ‘사람 집착’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아마 그 당시 친구들조차 이런 내 비밀은 모를 것이다. 겉으로는 당차고, 밝고 친구가 많은 아이 같아 보였을 테니까.


나조차 인간관계에 민감해졌던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분명 집 안의 정적은 익숙했는데, 집 밖에서 마주하는 혼자만의 시간은 견딜 수 없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혼자 밥을 먹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친구와 조금이라도 사이가 틀어지면 온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이 관계마저 잃어버리면 안팎으로 완벽하게 고립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 나를 지배했던 걸까. 명확한 이유를 아무리 떠올려봐도 명쾌하게 잡히지 않는다. 그저 친구와 멀어지는 걸 너무나도 두려워하며, 사이가 틀어지면 며칠을 앓아눕던 예민한 아이가 그곳에 서 있었다.


맞벌이 가정의 첫째로 자라며 내가 얻은 가장 큰 오해는 '혼자 있는 시간을 잘 견디면 독립적인 사람'이라는 착각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독립은 물리적으로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내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는 힘이었다. 오랜 시간 사람에 체해가며 뒤늦게 배운 사실은, 관계의 평온함은 내가 사람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은 뒤에야 비로소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이 친구가 없어도 나는 무너지지 않는다', '집 밖의 고독 역시 내 삶의 일부다'라는 사실을 몸소 겪으며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내 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가 타인에게 매달리지 않을 때, 내 안의 중심이 단단한 뿌리를 내릴 때 비로소 건강한 거리가 생겼다. 예전에는 상대의 기분을 살피느라 정작 내 마음이 무거워지는 줄도 몰랐다면, 이제는 내 기분을 먼저 돌보면서도 상대와 담백하게 어울리는 법을 안다. 집 안에서도, 그리고 집 밖에서도 기꺼이 혼자 설 수 있게 된 지금, 나는 비로소 어른으로서의 '온전한 자립'을 시작했다.


<그때의 나에게, 그때의 나와 같이 괜찮은 척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쓰는 편지>

안녕, 텅 빈 거실에서 가장 먼저 불을 켜던 아이야.

너는 참 일찍도 어른이 되었지. 부모님이 돌아오셨을 때 혹여나 걱정하실까 봐, 외로웠던 티를 내지 않고 환하게 웃어주던 네 마음을 알아. 텅 빈 집에서 너를 지켰던 건 그 어린 마음속에 깃든 깊은 사랑이었다는 것도.

하지만 밖에서 친구의 손을 놓칠까 봐 전전긍긍하며, 누군가의 기분에 네 마음을 맞추느라 정작 네가 체하는 줄도 몰랐던 그 시간들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집에서 다 써버린 의젓함 때문에, 정작 밖에서는 아이처럼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방황하던 네 모습은 결코 부끄러운 게 아니야.

이제는 너에게 말해주고 싶어. 친구와 조금 멀어져도, 가끔은 혼자 밥을 먹어도 네 세상은 무너지지 않아. 네 곁에 아무도 없는 순간에도 너라는 사람은 충분히 귀하고 단단하단다.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