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이렇게 읽는거야
“도대체 아이한테 책을 어떻게 읽어줘야 하는거야?”
이제 막 육아를 시작한, 또는 이제라도 책육아를 시작해보고픈 주변 지인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국어교육‘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이러한 종류의 노하우 전수를 요청받지만, 사실 나 또한 나이별, 단계별 독서법에 대해 심오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국어국문학이나 국어교육을 전공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전공자들이 독서에 일가견이 있지는 않다.
운동선수라고 하여 모든 사람이 금메달을 딸 수 있는 것이 아니듯, 독서는 개개인의 취향과 집중력, 관심에 따라 그 역량은 천차만별로 다르게 드러난다.
다만 내 아이를 책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는 데에 일조했다고 짐작되는 몇 가지 패턴들이 있긴하다.
나의 딸은 어떻게 책벌레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책을 그대로 읽어주지 말 것.‘
주변을 살펴보면 많은 부모들이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 유명한 전집을 종류별로 들여놓고, 아이방과 거실에 전면 책장, 회전 책장 등 각종 책장에 빼곡히 채워넣는다. 집을 북카페로 만들어 버릴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책 인테리어에 열과 성을 다 쏟는다. 책이 장난감 보다 더 많다면, 분명 아이는 책과 친해질 기회가 많아지고 책이 아이에게 익숙한 존재가 될 것이다. 부모는 그것을 노리고, 확실한 동기부여 상황을 만들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과연 책 좋아하는 아이로 만들어줄지는 의문이다. 예전에 ‘집사부일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카이스트 정재승교수가 출연해 본인의 집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작은 구립도서관을 방불케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서적들로 별채 하나를 가득 채워 놓고 있었다. 그러한 공간이라면 책을 안 읽을 수가 없을 것만 같았지만 교수님의 이야기는 그 기대를 시원하게 깨부숴주었다. 한 MC가 교수님의 아이들도 책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런데 교수님은 ‘그렇지는 않더라구요.’라고 슬픈듯 고백해 출연진 모두를 웃게 만들었다. 교수님의 말이 정확하다. 책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아이를 키운다고 모두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라지는 않는다. 애석하게도.
책으로 집안을 도배해 놓은 대부분의 부모들은 책장에 꽂힌 책을 한 권씩 뽑아들고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글자 그대로를 목소리를 바꿔가며, 손짓 발짓을 동원하여 열심히 읽어준다. 하지만 책을 있는 그대로 읽어주는 행위는, 어떤 아이에게는 좋을 수도, 또 어떤 아이에게는 좋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언니, 우리 딸은 책 읽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아, 책을 쳐다보고 있지를 않아.”라고 15개월 된 아이를 키우는 친한 동생이 말했다.
15개월짜리 아이가 책을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지 판단하는 것은 매우 섣부른 행동이지만, 어떤 점을 두고 이렇게 이야기하는지는 짐작이 갔다.
엄마가 ‘솔’톤의 낭랑한 목소리로 연기를 가미하여 최대한 재미있게 읽어주었지만, 두 페이지가 넘어가면 책을 덮어버리거나 책을 넘겨버리거나 다른 소리를 내거나 그 자리를 떠나는 등 누가 보아도 책을 싫어하는 것이 분명한 행동을 보였을 것이다.
난 우선 ‘당연하지’를 외치고, 그 친한 동생에게 책을 어떻게 읽어주었는지 물어보았다. 내 예상대로 그 동생은 책의 글자를 또박또박 정성들여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읽어주려 애를 썼고, 아이는 엄마의 그 정성을 보기 좋게 무시한 상황이었다.
15개월의 아이가 이 책이 주는 교훈과 따스함과 감동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마찬가지이다. 아직 ‘책’에 대한 정의도 내리지 못한 아이에게 우리는 너무나 심오한 책세계를 알려주려고 하진 않았던가 반성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우리 아이가 두돌이 지나고 문장으로 말을 하기 시작할 때까지 한번도 책을 있는 그대로 읽어준 적이 없었다.
그림책의 그림에 더 집중하여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질문에 대답하는 아이에게 박수를 쳐주고, 그림을 손으로 짚어가며 우리는 모든 것을 상상에 맡기고 무수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작가가 전하고자하는 메시지 따위는 관심 없었다. 나는 아이와 내가 둘만의 이야기를 꾸며내고 공유하는 그 시간이 너무나 값지고 좋았다.
아이는 그 빈약한 어휘력으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려 애썼고, 섬세하게 그림을 관찰하고 창의적으로 이야기를 지어냈었다.
그리고 그렇게 책을 읽는, 아니 이야기를 지어내는 그 시간들을 매우 즐겼다. 진심으로.
우리 아이는 그렇게 책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스토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아는 시점부터 나는 조금씩 책의 스토리라인을 따라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이 때에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읽어주는 행위는 지양하는 편이었다. 아이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 부분은 뛰어넘기도 하고, 너무 축약되어 있는 부분엔 부연 설명을 덧붙여 가며 굵직한 플롯 위주로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아이가 스토리를 외울 수 있게 말이다.
한 페이지에 1~2문장 정도로 요약하여 책을 읽어주면 아이는 자신이 자주 본 책은 그림만 보고도 내가 읽어주었던 내용을 읊을 정도로 책을 통째로 외우게 된다.
이후엔 마치 혼자서 책을 줄줄 읽는 것처럼 연기를 하며 가족들에게 자신있게 책을 읽어주는데, 어렸을 때 나와 했던 이야기 지어내기 스킬을 발휘하여
군데군데 재미있는 요소들을 첨가해 제법 이야기꾼처럼 책을 읽어준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과정에서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어휘를 사용했고, 완벽한 문장 구조를 재현해 내었고, 스토리도 탄탄하게 꾸며낼 줄 알게 되었다.
이 정도 경지에 올랐다면, 이제 책의 글밥들을 모두 아이에게 들이밀어도 좋다. 아이는 이제 모든 이야기를 소화시킬 준비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제법 긴 이야기들을 어려운 단어나 내용을 솎아내지 않고 아이에게 모조리 들려준다. 아이는 그렇게 책을 즐기고 스스로 독후활동까지 하며 점점 책벌레에 가까워져 가고 있다.
이 방법은 나의 아이에게만 통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집중력이 5~10분도 가지 않는 아이에게 책 한 권을 줄줄 읽어주는 것은 그리 재미있는 일은 아니다.
독서는 간접경험을 통해 사고력과 창의력을 기르고 타인의 삶을 공감하고 이해하며 이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한 활동이다.
꼭 작가가 적은 모든 것을 그대로 읽어내고 흡수할 필요는 없으며, 자기만의 이야기와 잣대를 세워나가는 것 또한 못지 않게 중요하고 이것이 더 큰 가치가 될 수 있다.
나는 늘 나에게 독서에 대해 묻는 모든 이들에게 책을 읽는 것보다 책을 읽고난 후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부디 책을 읽어주고 그 내용을 아이의 머릿속에 집어넣어 주는 것에만 급급한 부모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책을 읽고 난 후 아이가 더 나은 생각을 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부모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책을 있는 그대로 무조건 읽기 보다는 더 나은 생각과 더 나은 방향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읽는 것 또한 필요하다.
책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아이만의 책 세계를 만들어주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오늘도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들로 한바탕 이야기 대잔치로 하루를 마감한 딸 아이를 보며 이 아이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내가 잘 가꿔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