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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지안 Jul 07. 2020

무잔고, 무남편, 무직 되다

실직,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실패

실패를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오히려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며 매 순간 신중한 선택을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절대 실패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부단히 노력했다.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실패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굳은 의지로. 대학 후배의 “가방끈이 길어지면 좋을 것이 없다."라는 진심 어린 조언에도 대학원에 진학했고, 낮에는 어학원에서 수업을 하고 밤에는 대학원에서 수업을 들었다. “자기 계발서는 다 똑같더라.”라고 하는 친구의 말에도 나는 자기 계발서를 읽고 또 읽었다. 밤 11시까지 일하고 돌아온 엄마에게 칭찬 한마디 듣고 싶었던 어린아이가 아직도 내 안에 있었던 걸까?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온갖 강의이며, 수업이며 열심히 쫓아다녔다. 그러면서 조금씩 한 인간으로서, 직업인으로서 나아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2년 전, 우연히 나에게 학원을 운영할 기회가 생겼다. 오너 사장도 아닌 월급 사장의 어깨가 그렇게까지 무거울 줄은 미처 몰랐다. 운영을 시작한 후 3년 동안은 투자 기간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수익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았다. 교육사업을 두고 교육이냐 사업이냐 말도 많지만, 사실 교육이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사업이다.


내가 운영을 시작하고 만 2년이 되어갈 무렵에 기적처럼 매출이 두 배가 되었다. 직장에서의 모든 것이 좋아지고 있었다. 더 많은 학부모들은 우리를 좋아했고 신뢰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자부심을 느꼈고, 성장했고, 연대했다. 우리의 성장과는 별개로, 나의 몸과 마음은 급속도로 소진되고 있었다. 역시 무리한 도전이었을까? 몸이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고, 매일 악몽에 시달렸으며, 매일 아침 출근 전에 머리를 감으며 나도 모르게 “도망치고 싶다.”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고생만 하고 돈은 못 번다는 교육업계에서 가장 말단부터 시작하여 한 우물 10년, 학원 운영까지 하게 된 나를 나도 모르게 자랑스럽게 여겼나 보다. 엄마가 나를 자랑스럽게 여겼을 때도 ‘이 정도가 자랑할 일인가?’라고 생각했는데, 내심 그게 아니었나 보다. 지난 2년간, 우리 건물에 불이 나기도 했고, 술 취한 고객에게 육두문자를 듣기도 했으며, 각종 황당한 루머에 시달리면서도 나는 끝내 그 자리를 놓고 싶지 않았나 보다. 그래도 끝까지 스스로 내려놓지 않은 걸 보면.


2020년은 나에게 포기할 수 없었던 해였다. 내 몸과 마음을 갈아 넣어서라도 올해 3년 차 운영을 꼭 해보고 싶었다. 여전히 매일 도망가고 싶고, 멈추고 싶었지만 그것을 억누르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 당시 경쟁 학원들의 네거티브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종 루머를 생산하며 우리가 망할 거라고 했다. 내가 월급사장이라서 언제 도망갈지 모른다고 했다. '내가 매일 아침 머리를 감으며 중얼거렸던 말을 들었나?' 뜨끔하기도 했다. 나는 그런 근거 없는 말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모두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그들의 말이 현실이 될까 봐 극심한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짓말처럼 코로나 사태가 찾아왔다. 사태 초기의 나는, 나만의 ‘메르스 대응 매뉴얼’을 급히 꺼냈다. ‘불도 났었고, 욕도 들었는데 방역도 못할 게 뭐 있을까? 메르스 때도 위기를 잘 넘겼잖아.’라며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진짜 소리를 무시했다. 내 몸과 마음은 ‘코로나 리스크’를 전면에 내세우며 이제 제발 그만두라고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내가 실패를 선택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방역도, 나의 결정도 아니었다. 우리 사업의 운영자금을 지원하는 회사의 다른 모든 사업들이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리 사업은 그동안의 투자가 수익으로 전환되려는 중요한 찰나였다. 하지만, 돈줄을 쥐고 있는 회사는 여기저기서 밀려오는 손실을 감당하기 어려워졌고, 불과 일주일 만에 운영자금 지원을 중단했다. 즉시 우리는 모두 실직했으며, 나는 200명의 학부모에게 사죄와 감사의 마음으로 이별 편지를 썼다.


한순간에 스타트업 수준의 열정을 불태우던 우리의 직장은 장례식장이 되었다. 너무 지쳐서 차라리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어리석은 생각까지 했던, 소중한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진짜로 사라져 버린 기분이랄까? 학부모들과 아이들이 찾아와서 내 손을 잡고 같이 울어주었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같이 울었다. 그와 동시에 지난 2년간 ‘혹시 남편이 될 수 있을까?’ 매일 고민하게 하던 그 사람도 나에게서 떠나갔다.


나는 직장을 잃을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심을 다해 일했고, 한시도 쉬지 않았으며, 우리는 인정받고 있었으니까. 매일 망할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그럴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나만 포기하지 않으면 되는 줄 알았다. 우리 배를 한 번에 집어삼킬 만한 절대로 피할 수 없는 폭풍우가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나만 이 배를 버리지 않으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거라고 믿었던 한심한 선장이었다. 심지어 나는 월급이라는 것은 내가 그만두지 않는 한 계속 주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10년간 열심히 산 대가는 잔고 없는 통장뿐이었다.


마흔을 앞둔 지금, 옳다고 생각하고 그 길로만 달려온 나는 경제적인 여유도, 사랑하고 사랑받는 기쁨도, 성공의 달콤함도 얻는데 실패했다. 실패를 해야 성공에 한 걸음 가까이 간다는 말은 자기 계발서와 강의에서 수도 없이 보고 들었다. 하지만 이제 돌아보니, 나는 실패하지 않는 길을 원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극도로 불안해하면서 사소한 일까지 집착했나 보다. 그래서 24시간 동안 일하고, 꿈에서도 일했나 보다. 내가 손쓸 수 없는 실패를 맞이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저 나의 결정과 선택이 실패를 가져올까 두려워 전전긍긍했나 보다. 하지만 실패는 내가 한 결정과 선택이 아닌, 그들의 결정과 선택으로 나에게 찾아왔다.


실패할까 봐 두려웠던 나는 이제 실패를 감당하기가 두렵다. “두려움을 없애겠다는 건 신이 되겠다는 거예요.” 유시민 작가가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을 물어보려고 故 제정구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 들은 말이라고 한다. “인간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참는 것, 두렵지만 하는 것”이라고.


나는 두려움을 없애려는 노력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을 그대로 남겨둔 채, 두렵지만 다시 내 일을 하려고 한다. 무일푼, 무남편, 무직까지 된 나를 일으킬 사람은 나밖에 없기에. 인생에서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피하려던 그 실패를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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