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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지안 Sep 09. 2020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4회차: 선생님, 제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네 번째 심리상담을 하는 날이 되었다. 


상담이 예정된 3시 정각.


네 번째로 상담센터가 위치한 낡은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탔다.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출렁할 때 가슴이 '쿵'했고 세 번째에는 '콩'했는데, 오늘은 네 번째이니 아무렇지 않으려나?'라는 생각을 하는 중에 엘리베이터가 7층에 도착했다.


'철컹'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심장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나는 약간 들뜬상태로 상담실 안으로 들어갔고, 그 안에서 지쳐 보이는 상담사가 애써 힘을 내며 나를 맞이했다.


상담사: 오셨어요?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나: 네.

상담사: 한 주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나: 괜찮았어요. 악몽을 꾸기도 했지만요.

상담사: 저런. 악몽을 꾸셨군요. 어떤 악몽을 꾸셨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나: 세 번 정도 꾼 거 같은데, 자세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아요. 그중 하나는 악몽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네요. 그냥 엄청나게 바쁘게 일을 하는 꿈이었어요.

상담사: 아, 꿈에서 바쁘게 일을 하는. 그랬군요. 꿈에서 어떤 일을 하셨어요?

나: 원래 하던 일이요. 학원에서 정말 바쁘게 정신없이 일하는 꿈.

상담사: 그렇군요. 구체적인 상황을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나: 아, 구체적인 상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냥 평소처럼 상담하고, 선생님들이랑 미팅하고, 전화 통화하고......

상담사: 그렇군요.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요?

나: 그러게요. 음, 근데 그 꿈은 확실히 악몽까진 아니었어요. 좋은 꿈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나쁜 느낌은 아니었던걸 보면, 아마도 다시 일을 하고는 싶은 마음과 여전히 심신이 많이 지쳐서 쉬고 싶은 마음이 섞인...... 양가감정 같은 것이 무의식에 있다가 꿈으로 나타난 게 아닐까요?

상담사: 오, 네. 좋은 해석이네요.

나: 그래요?

상담사: 네. 저는 타인에 의한 꿈 해석보다는 스스로 하는 꿈 해석이 더 맞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자신의 생각과 마음에서 나온 꿈이니 스스로 해석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으니까요.

나: 아, 네. 아무래도 일을 하면서 얻어지는 것들, 성취감이나 인정 같은 것들에 대한 갈망이 있나 봐요. 그러면서도 너무 바쁘고 힘들게 일하던 때를 생각하면 두렵기도 하고.

상담사: 맞아요. 사람은 일이 필요해요. 누구나 그렇죠. 그건 아주 당연한 마음이에요.


나: 네, 그렇겠죠. 그런데, 선생님 제가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상담사: 네, 그럼요. 말씀하세요.

나: 사실은 제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정말 힘든 점이 있는데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직장에서 보면, '낙하산'처럼 업무와 관련된 아무런 능력이나 경력이 없이 대표나 임원 자리에 앉아서 아무 일도 안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특히 본사(모회사)가 있는 자회사라면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 너무 화가 나요. 물론 누구나 이런 사람들을 싫어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냥 '저 사람 뭐야?'라고 생각하는 정도인 거 같은데 저는 정말 참을 수 없는 분노 같은 것이 느껴져요.

상담사: 아, 그렇군요. 능력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화가 많이 나신다는 거죠?

나: 네. 화가 많이 나지만 어쩌겠어요. 직장생활이니까 그냥 참는 거죠. 일을 시작하고 초반에는 저도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이런 분들이 높은 자리에 있어도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경력이 쌓이고, 또 직급이 높아지고, 결정권을 가지게 되면서 그분들의 행동이나 모습에 심한 분노를 느끼게 되더라고요.

상담사: 그렇군요. 그런 사람들의 어떤 모습에 화가 많이 나세요?

나: 본사(모회사)에서 좌천됐거나, 퇴직 후에 2년 정도 편하게 월급 받으면서 쉬다 가는 자리라서 그런지 아무 일도 안 하시거든요. 아무 일도 안 하면서 연봉은 억대고요. 고연봉이지만 어쨌든 직원이니까 본사에 눈치는 보잖아요. 그러다 보니 괜히 어슬렁거리며 왔다 갔다 하고, 쓸데없는 말을 하기도 하고요. 뭐라도 하는 척하려는 거겠죠. 그런 모습을 보면 가슴에서 올라오는 화 있죠? 그런 게 훅 올라와요.

상담사: 아...... 하는 일도 없으면서 괜히 어슬렁거리기나 하고, 도움은 커녕 방해만 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고 화가 나면 어떻게 하셨어요?

나: 너무 심하게 화가 나지만, 그렇다고 면전에다가 화를 낼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참는 거죠. 화가 나는데 계속 참기만 하니까 너무 힘든 거고요. 그러다가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상담사: 네. 자기 할 일을 제대로 하지도 않고, 자기가 뭐나 되는 양 으스대는 사람들. 그런데 또 돈은 억대로 받아가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보면 아주 많이 화가 나시는 거죠?

나: 네. 맞아요.

상담사: 말씀을 듣고 나니 한 사람이 떠오르네요.

나: 누구...... 요?


내가 그게 누구냐고 물어보고 나서 상담사가 대답하기까지 2초 남짓, 설마 내가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믿고 싶은 강한 마음을 느꼈다.


상담사: 아버지요.

나: 아...... 네.

상담사: 아버지가 해야 하는 역할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런 역할은 제대로 하지도 않고, 본인이 아버지로서 대접은 받으려고 하는. 딱 그 모습이네요.

나: 아.....


이 순간 무엇인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불현듯 코앞에서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무언가 '탁'하고 놓아지는 듯한, 아니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다지 불쾌하지도 시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팽팽히 잡고 있었던 고무줄을 탁 놓아버린 기분이 드는 건 확실했다.


나: 선생님, 그럼 제가 의식하진 못해도 직장에서 만난 그런 사람들과 아버지를 동일시하는 건가요? 그래서 분노를 크게 느끼는 거고요?

상담사: 맞아요. 그 모습이 그대로 보이니까 화가 날 수밖에 없죠.

나: 그렇군요. 사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에요. 내가 왜 이렇게 까지 분노를 느끼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빠에 대한 분노 때문일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 같아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인정해버리면 사실이 되니까. 이제 곧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 제가, 물리적,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한 제가, 아직까지도 과거의 일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선생님이, 제3자의 시선으로 그렇다고 말해주시니 뭔가 도장이 찍힌 것처럼 확실해지네요.

상담사: 그렇군요. 인정하고 싶지 않았군요. 지금은 독립해서 잘 살고 있는 중인데, 아직도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런 감정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중요해요. '아직도' 아버지를 싫어하고 분노를 느끼는 감정을 부정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과거로 돌아가야 해요. 과거로 돌아가서 아버지로 인해 힘들었던 '나'를 바라봐주어야 해요. 나의 감정을요. 물론 지금은 독립해서 잘 살고 있지만, 상처 받고 괴로웠던 어린 나를 바라봐주는 거예요.

나: 하아...... 네. 그렇군요.

상담사: 자신의 역할을 비교적 잘 수행했던 아버지를 둔 사람이라면 낙하산으로 온 사람을 본다던가 하는 상황에서도 '뭐 그럴 수도 있지. 몇 년 잘 쉬다 가시겠지.'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어요.

나: 네......(정말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건가요?)

상담사: 요즘에는 정말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많았죠. 제 큰 아버지는 심지어 '첩'을 두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무렇지 않았던 거예요. 다 그러려니 했죠. 그런데 지금은 누구도 그것을 정상으로 바라보지 않죠.


나: 네. 그렇죠. 선생님, 그러면 혹시 제가 남자 친구를 만날 때도 가끔씩, 자주는 아니지만요. 특별한 이유 없이 이렇게 '훅'올라오는 듯이 화가 날 때까 있는데, 그것도 혹시 무의식 중에 어떤 동일시가 일어나는 현상일까요?

상담사: 네. 그럴 수 있죠. 아버지가 남자이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나: 네. 그렇군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 상황, 말투에서 '훅' 올라오는 감정을 느끼거든요.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맞는 거 같네요.

상담사: 그렇게 '훅'올라오실 때는 어떻게 하셨어요?

나: 감정이 올라올 때, 일단 생각을 했어요. '이게 과연 내가 화를 낼 일인가?' 하고요. 생각해보면 화를 낼 정도는 아닌 거 같고. 화가 나는 이유도 제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아서 '내가 왜 이러지? 이러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면서 넘어갔죠.

상담사: 정말 잘하셨네요. 우리가 '인지치료'라고 해서 잘못 인지된 부분을 수정하는 치료법을 사용하기도 하거든요. 그걸 스스로 해내신 거예요. 의식이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나: 그렇군요. 의식은 건강한데 무의식이 썩어 문드러져 있는 거네요. 하하.

상담사: (긍정의 눈빛을 보내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이게 참 쉽지 않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일단 화가 나는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줘야 해요.


몰랐던 것이 아니다.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어떻게 보면 간단하고 별 것 아닐 수 있는 '인정하기'라는 것이었다. 알면서도 인정하지 못하고 있던, 오래 묵은 무언가를 '탁'놓아 버리 위해 나는 참 오랜 시간을 돌아온 것 같다. 결국 소중한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서야 남이 보면 별 것도 아닌 거 같은 '놓아버림'을 경험하게 되었다.


억울한 감정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분명 억울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왜 아버지라는 존재 때문에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괴로워해야 하는 것일까? 행복한 가정까진 아니더라도 '정상적인' 아버지를 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이 금세 서러움으로 변해갔다. 서러움인지 억울함인지 모를 뒤엉킨 감정이 느껴졌다.


상담사: 벌써 시간이 다 되었네요. 오늘 상담을 마무리할 시간이에요.

나: (시계를 보며) 그러네요.

상담사: 오늘은 꿈 얘기로 시작해서 직장생활에서 힘들었던 부분을 얘기해주셨어요. 남자 친구와의 관계에서 겪었던 감정들도 얘기해봤고요. 다음 시간에 오실 때는 과거로 돌아가서 내가 힘들었던 상황과 그때 느꼈던 내 감정에 대해 글로 쭉 적어오시겠어요? 그러면 상담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네. 그럴게요.

상담사: (지친 얼굴로 문 앞까지 배웅하며) 수고하셨어요. 조심히 가세요.

네: 네. 제가 오늘 말이 너무 많았죠? 고생 많으셨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글로 적어오겠다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사실 나는 하기 싫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굳이 현재 기억으로까지 뒤풀이해야 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정말 싫지만, 그냥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치료과정이라고 생각하며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맹장수술을 앞두고 있을 때가 떠올렸다. 나는 맹장이 터진 경우가 아니고 부풀어 있는 상태에서 구토와 복부 통증으로 병원에 갔다가 맹장염을 발견한 케이스라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담당의사는 맹장이 터지기 전에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당일에 바로 수술 스케줄을 잡고 기다리는 중에, 수술 후에 느낄 통증이 지금보다 훨씬 심할 것 같아서 수술을 하는 것이 싫었다. 수술이 끝나고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병실로 옮겨져 있었는데, 마치 지금 수술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그 고통은 점점 나아졌으며 일주일쯤 지난 후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내 상처와 아픔을 치료하려면 수술이 필요하겠지. 수술은 아프다. 하지만 아프고 나면 반드시 고통이 사라진다고 믿는다. 맹장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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