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차: 언니, 능력 있다. 고마워.
지난주에는 내 전담 상담사의 휴가로 상담이 없었기 때문에 2주 만에 다시 심리상담센터를 찾았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지난번에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출렁할 때 심장이 쿵 했던 일이 떠올랐다. 불안했다.
두 번째 상담 직후 일주일은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즐거웠고, 다른 한 주는 불안하고 무기력했다. 그 일주일간은 악몽도 꿨다.
'오늘도 엘리베이터에서 심장이 쿵 할 정도로 불안하려나?'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7층을 누르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만졌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숫자 7이 보이고 또 한 번 엘리베이터가 출렁했다. 오래된 건물에 오래된 엘리베이터라서 그렇겠지. 이번에 내 심장은 '쿵'하지 않고 '콩'했다. 저번보다 반응이 약해진 것이 내심 기뻤다.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라며 상담센터로 들어갔다.
상담사: (환영하는 듯한 음성으로) 어서 오세요!
유난히 새파란 마스크를 쓰고 작은 안경을 쓴 내 전담 상담사가 밝게 인사한다.
나: 안녕하세요! 휴가는 잘 다녀오셨어요?
상담사: 네. 덕분에요.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나: 네. 2주 만에.
상담사: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나: (TCI 결과지를 쳐다보며) 잘 지냈어요.
상담사: 그랬군요. 잘 지내셨다니 다행이에요. 지난번에 하고 가신 TCI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이것 말고 혹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실까요?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면 그것을 중심으로 오늘 상담을 진행해도 되니까요.
나: 아니요. 딱히 그런 건 없는데, 검사 결과가 궁금해요.
상담사: 그렇죠. 궁금하시죠? 일단 결과지를 보여드리면서 말씀드릴게요. 여기 8가지 항목이 있는데 위쪽 4가지 자극 추구, 위험회피, 사회적 민감성, 인내력은 '기질', 즉 타고 나는 성향이고요. 아래쪽 3가지 자율성, 연대감, 자기 초월은 '성격', 즉 살면서 형성된 것들이에요.
나: 네. 그렇군요. 탐색적 흥분과 자유분방함이 매우 높네요?
상담사: 네. 맞아요.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고, 자유로운 기질을 타고 나신 거예요. 하지만 충동성은 높지 않아요. 탐색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충동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 거죠.
나: 맞는 것 같아요. 새로운 지식이나 정보를 탐색하는데 자주 몰입하곤 해요. 자유롭고 싶은 열망도 큰 거 같고요. 하지만 사람들은 저를 안정적이고, 심사숙고하고, 절제하고, 질서 정연한 사람으로 봐요. 검사 결과와 정 반대로요. 하하. (전 가식적인 사람인가요?)
상담사: 사람들이 그렇게 볼 수도 있어요. 후천적인 성격으로 그런 부분들을 키우신 거죠. 노력을 정말 많이 하신 것 같아요. 아주 좋은 거예요.
나: 하하. 네. 제가 노력은 나름대로 많이 한 거 같아요. 부족한 부분은 성장시킬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상담사: 네. 맞아요. 정말 훌륭해요! 다음은 위험회피 부분인데, 예기불안이 굉장히 높은 편이에요. 평균이 7.8 정도인데 지안 님은 17로 나왔어요.
나: 정말 높네요...... 사실 불안 때문에 심리상담을 결심한 게 크고요. 불안이 올까 봐 또 불안하고. 그런데 사람들은 저를 불안한 사람으로 보기보단, 낙천적인 사람으로 보는 거 같아요.
상담사: 그래요? 왜 그런 거 같으세요?
나: 예를 들어 지금 불이 났다, 그러면 일단 불안해할 시간이 없잖아요? 빨리 불을 끄는 게 중요하니까. 물론 불안하죠. 극도로. 하지만 일단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고 실행하는데 집중하려고 하는 거 같아요. 그런 모습만 보고 제가 긍정적이라거나 낙천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낙관적(앞으로의 일이 잘되어 갈 것으로 여기는 것)'이긴 해도, '낙천적(세상과 인생을 즐겁고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진 않거든요. 늘 무슨 일이 생길까 불안해요.
상담사: 그렇군요. 자, 눈을 감고 불안해하고 있는 '나'를 한번 바라보세요. 아, 이렇게 불안에 떨고 있는 나. 그런 '나'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나: 어리석어요. 불안해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는데, 왜 그러나 싶어요.
상담사: 그렇군요. '어리석다'라는 판단이 드는군요. 지금 머릿속에 그려지는 불안해하는 그 사람은 몇 살인 거 같으세요?
나: 음, 20대인 거 같아요.
상담사: 아, 20대군요. 그럼 그런 불안에 떨고 있는 20대의 나에게 '어리석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몇 살이에요?
나: 제 나이예요. 30대 후반.
상담사: 그렇군요. 그럼 30대 후반인 '내'가 20대인 '나'에게 '어리석다'라고 하는 거네요.
나: 아......
상담사: 20대의 '나'는 어땠어요?
나: 직장에서는 그 일을 왜 하는지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전혀 모르고 일했어요. 맥락도 모르고, 지식도 없고, 어학실력도 별로고. 비즈니스가 뭔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 연봉은 어떻게 올라가는지, 뭐 아무것도 모른다고 봐야 해요.
상담사: 그랬군요. 그럼 20대의 '나'는 어떤 걸 원하고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했나요?
나: 그저 좋은 남편 만나서 마음의 안정을 찾아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던 것 같아요.
상담사: 그래요. 저는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풋풋한...... 뭐랄까 긍정적인 느낌이 드는데요? 어떠세요?
나: 네. '남'이라고 생각하면 그런데, 저 자신한테는 그게 잘 안되나 봐요.
상담사: 그렇군요. 그래요. 낯선 사람에 대한 수줍음은 아주 낮게 나왔어요.
나: 네. 처음 보는 사람 하고도 편하게 얘기하는데 어려움은 없는 거 같아요.
상담사: 그래요. 좋은 거죠. 정서적 감수성도 매우 높게 나왔어요.
나: 네 맞아요. 제가 생각해도 감수성이 풍부한 거 같아요. 하하.
상담사: 호호. 그래요? 그렇군요. 성취에 대한 야망과 완벽주의도 굉장히 높아요.
나: 네. 맞아요. 제가 힘든 부분 중에 하나가, 이상이 너무 높다는 거예요. 이상은 높은데, 현실에서 능력은 그렇지 못하다 보니...... 그 차이가 너무 크니까 괴로운 거 같아요.
상담사: 그래요. 이상과 현실의 갭(gap)이 크면 힘들 수밖에 없지요. 지안님 생각에는 왜 성취에 대한 야망이 높은 거 같으세요?
나: 음, 이건 책에서 봤는데요. '나'라는 존재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을 못하는 거 같아요.
상담사: 맞아요. 존재만으로 소중하죠.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을 못할까요?
나: 뭔가 특별해야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상담사: 그렇군요. 특별하고 싶은 마음, 그건 정말 정상적인 욕구예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누구나 특별하고 싶어 해요. 그건 '정상'이에요. 이상한 게 아니에요. 지난번에 했던 것처럼, 눈을 감고 양팔을 이렇게 크로스로 안듯이 어깨에 올려보세요. 그리고 너무나도 정상적인 특별하고 싶은 내 마음을 바라봐주세요. "아, 내가 특별해지고 싶구나. 정상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마음이다." 자, 이제 천천히 눈을 떠보세요.
나: 네.
상담사: 사람은 누구나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지안님이 그 마음이 더 강할 수는 있지만, 그게 문제는 아니에요. 왜 특별해지고 싶을까요? 이유가 있는 것 같으세요?
나: 책에서 보니까 어렸을 때 무조건적인 사랑, 지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이 특별해야만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저도 그런 케이스가 아닐까 생각해요.
상담사: 네. 너무 잘 알고 계시네요.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3살부터 학교 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냥 존재만으로 특별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줘야 해요. 부모나 양육자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죠.
나: 네. 저는 존재만으로 특별한 사람이라고 느낀 경험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특별해지려고 하나 봐요. 결핍 때문에.
상담사: 네. 그렇군요. 이거는 좀 엉뚱한 얘기일 수도 있는데, 한번 들어보실래요?
나: 네. 어떤......?
상담사: 사람은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반드시 느껴야 해요. 그렇게 느껴야 할 시기에 그러지 못했으니 지금이라도 무한한,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야 해요. 이걸 해결할 수 있는 극단적인 방법이 두 가지 있어요.
나: 그 두 가지가 뭔가요?
상담사: 하나는 종교를 가지는 거예요. 신은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니까요. 다른 하나는 나의 존재만으로도 가치 있게 여겨주고 존귀하게 대해주는 남편(배우자)을 만나는 거예요.
나: 그렇죠. 안 그래도 저도 그 두 가지를 시도해봤는데, 잘 되진 않았어요. 종교 같은 경우에는 제가 원하기만 하면 아무 조건 없이 활짝 열려있긴 하죠. (종교시설 같은 곳에) 몇 번 가보려고 시도는 했는데, 결국 저는 별로 종교를 가지고 싶지 않더라고요. 배우자를 찾는 방법 같은 경우에는 제가 원한다고 해도, 상대방이 원하는 것도 중요하고 쌍방이기 때문에 역시 쉽지 않았고요. 그렇지만 언젠가는 저의 존재만으로도 귀하게 여겨주는 사람을 만날 거라고 믿고는 있어요. 그게 언제 일진 모르지만, 그때까지 저에게 주어진 시간을 건강하게 잘 살아내기 위해 심리상담도 받는 거죠.
상담사: 맞아요. 그 두 가지에서 해결이 안 되면 심리상담이 역할을 하게 되죠.
나: 네. 제가 그래도 맞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네요.
상담사: 그럼요. 잘하고 계세요. 최근에 가장 편안했던 일에 대해 떠올려보시고 얘기해주실래요?
나: 지난 5년 동안, 제주도를 정말 자주 갔었어요. 많이 갈 때는 일 년에 네 번도 가고. 제주도에서 보냈던 시간은 정말 편안했어요.
상담사: 그랬군요. 그럼 눈을 감고, 지금 제주도에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눈 앞에 뭐가 보이나요?
나: 바다, 현무암, 산책길이 보여요.
상담사: 그렇군요. 바다는 무슨 색인 가요?
나: 새파란 색이에요.
상담사: 하늘은요?
나: 흰색과 하늘색을 섞어 놓은 듯한. 날씨가 아주 좋아요.
상담사: 네. 지안님은 어떤 옷을 입고 있나요?
나: 청바지를 입고 있어요.
상담사: 청바지를 입고 있군요. 기분이 어떤가요?
나: 편안해요. 아주 좋아요.
상담사: 자, 이제 눈을 떠보세요. 방금 해보신 게 '심상치료'인데요. 나를 편안하게 해 줬던 경험, 이미지, 장소 같은 것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면서 머릿속에 그려보는 거예요. 하루에 한 번은 꼭 이 심상치료를 해보세요.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사실 불안도 '습관'이거든요.
나: 아, 불안이 습관이라면 '편안'도 습관이 될 수 있겠네요. 심상치료를 하면서요.
상담사: 네. 정말 잘 알고 계세요. 잘 알고 계신 분을 만나니 저도 정말 좋네요. 누가 심리상담은 '공동 연구'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 말이 참 좋았어요. 내담자의 어려움을 함께 연구해서 삶이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가도록 하는 거죠. 자료는 내담자가 다 가지고 있지요. 지안님은 좋은 자료들이 정말 많아서 제가 더 열심히 연구하고 싶은 동기가 팍팍 생기는데요?
나: 정말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공동 연구'라...... 좋네요.
상담사: 네. 좋습니다. 이번엔 성격 파트인데, 이타성이 높은 편이고 공평한 것을 추구하는 것도 높아요.
나: 네. 다른 사람들 챙겨주는 거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강한 거 같아요. 배고픈 사람 있으면 밥 사다 주고 싶고, 뭔가 배우고 싶은 사람한테 제가 정보를 알아봐서 링크도 보내주고, 그런 것들이요. 오히려 내가 받고 싶어서 주려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음, 근데 이건 그냥 (이것저것 따지기보다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 같아요. 그리고 '공평'을 추구하는 것...... 저는 '공평'이라는 가치에 지나치게 민감한 것 같아요. 항상 '공평'때문에 화가 나고, 감정을 조절하는 게 힘들어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상담사: 그렇군요. 앞으로 지안님이 가지고 있는 불안, 그리고 공평을 추구하는 마음에 대해 같이 연구해봐요. 모든 감정에는 중요하고 타당한 이유가 있으니까요.
나: 네. 공동 연구. (웃음)
상담사: 오늘 상담에서 불편한 점, 반대로 좋았던 점이 있었나요?
나: 불편한 점은 없었고, TCI 검사를 통해 뭔가 수치화되어 제 기질과 성격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상담사: 네. 그랬군요. 좋아요. 그럼 다음 주에 또 얘기 나눠요.
세 번째 심리상담이 끝났다. 나아지고 있는 걸까? 내가 심리상담을 꼭 받아야 하는 사람일까? 또다시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곧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있어. 내가 나를 위해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다친 마음을 치료해주고 있어.'
그 순간, 맥락도 모르고, 지식도 없고, 어학실력도 별로고, 비즈니스가 뭔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 연봉은 어떻게 올라가는지, 뭐 아무것도 모르는 바로 그 20대 중반의 동생이 30대 후반 언니에게 고마워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니 덕분에 상담도 받고, 치료받을 수 있었어. 언니 능력 있다.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