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지안 Aug 15. 2020

나를 돌보지 못하는 나

1회차: 자신을 얼마나 돌보고 있나요?

'방문하신 분은 벨을 눌러주세요.'라는 안내문구가 보인다.

심리상담센터 입구에서 벨을 누르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60대 여성 상담사가 문을 열어주며 나를 반겨주었다.


상담사: 어서 오세요! 반가워요.


나도 덩달아 밝게 인사를 한 뒤 상담실에 앉았다. 화려한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곳이 아니라서 그런지 예전 민들레영토(90년대에 생긴 스터디룸 형식의 카페)의 룸과 같은 레트로 느낌이 났다. 마음은 편안했다. 상담사가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여서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었다.


상담사: 일단, 저는 여기까지 오신 분들은 정말 현명하다고 생각해요. 스스로의 어려움을 인지하고 도움을 청하기로 결정을 하신 거잖아요. 정말 잘 오셨습니다. 처음 만났으니 제 소개를 먼저 해도 괜찮을까요?


첫날이라서 지루한 심리검사지에 서면으로 답을 할 각오를 하고 갔는데, 의외로 바로 대화를 통한 상담이 시작됐다.


상담사: 저는 원래 다른 일을 하던 중에 호주로 가서 상담심리 석사학위를 따고, 호주 현지에서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카운슬링을 했어요. 이후 한국에 돌아와 공공기관에서 상담 일을 하다가 정년퇴직을 했어요. 퇴직 후에 여기 센터에서 상담을 하고 있답니다. 지안 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 여쭤봐도 될까요?


교사가 질문을 할 때, 학생들이 가질 수 있는 심적인 부담감을 낮추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들려주고 나서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많이 썼던 방법이다. '학생' 입장이 되어보니 이 방식이 편안하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부터 중간관리자, 그리고 학원 운영자로 일했다고 대답했다.


상담사: 그렇군요. 어떤 부분에서 심리적으로 불편함을 느끼셔서 상담에 오셨을까요?


나: 크게 세 가지인데요. 한 1년 반 전부터 화가 나면 그 화를 통제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느껴졌어요. 전에도 화가 난 적이 있었지만 잘 눌러졌는데, 그때부터는 눌러지지가 않더라고요. 그때부터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정신없이 그냥 시간이 지나가버렸어요.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는 화가 날 일이 없으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상황은 늘 있는 것이고, 도움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상담사: 그러셨구나. 잘 오셨어요. 맞아요. 트리거(trigger)가 되는 상황은 늘 일어나죠. 나머지 두 가지는요?

나: 인간관계를 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상담사: 인간관계 회피가 일어나고 있군요. 그리고 또 하나는요?

나: 교통사고 트라우마인데요. 최근에 3번의 교통사고가 있었는데 저를 포함해서 사고의 당사자들 중 누구도 심하게 다친 경우는 없었고 병원에 입원하지도 않았어요. 교통사고는 정말 많이 일어나잖아요. 그런데 저는 심한 사고가 전혀 아닌데도, 차를 타면 다른 차와 부딪칠 것 같아서 불안해요. 고속도로에서는 다들 110 이상으로 달리잖아요. 그런데 차 계기판에 속도가 110만 되어도 가슴이 쿵쾅거리고 불안해요.

상담사: 운전을 하시는 거예요?

나: 아니요, 제가 운전을 못해서 다른 사람 차를 타고 다니는데 운전하는 사람이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제가 말은 안 해도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니.

상담사: 그렇구나. 정말 그러겠네요. 불편하거나 화가 나는 것은 '매우' 타당한 이유가 있거든요. 지안 님이 불편했거나 화가 났던 구체적인 일을 말씀해주실 수 있으세요?

나: 예전에 직장생활을 할 때 상사의 모습을 보고 화가 많이 났었어요. 성실하고 괜찮은 분이었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살아서 미래에 될 모습이 저런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를 들면, 화장실에서 수도관이 터져서 물난리가 난 적이 있었어요. 교실 바닥으로 2~3cm 정도 물이 찼어요. 아이들은 책상 위로 올라갔고요. 그때 선생님들이 다 같이 나와서 수건으로 바닥에 물을 닦아서 짜내면서 청소를 하고 나서,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상사분이 "나도 청소하다가 (네일아트 한) 손톱 부러졌어, 힝"이러더라고요. 그때 정말 화가 났어요. 그런 비슷한 사건들에 대해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하면, 무슨 말인지 잘 이해를 못하더라고요. '싫을 수는 있는데 그게 화가 날 일인지는 모르겠다'는 식의 반응이었어요. 점점 이해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고, 조금씩 거리를 두게 된 것 같아요.


상담사: 그랬군요. 친구들은 이해를 못했군요. 선생님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 거 같으세요? 사람은 내가 정말 원하는 것들이 좌절됐을 때 불편하거나 화가 나거든요.

나: 잘 모르겠어요.

상담사: 자 그러면 제가 적어볼게요. '가치', '의미', '품위', '교육자답게' 이 것들을 한번 보세요. 선생님이 원하는 것이 맞는 것 같으세요?

나: 네. 맞는 것 같아요.

상담사: 그럼 이 단어들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나: 음. 잘 모르겠네요.

상담사: 정말 좋은 것들 아니에요? 건강하고요.

나: 글쎄요. 유니콘 같은 것들이네요. 실체가 없는. 없는 것을 그동안 쫓아다닌 것 같아요.

상담사: 그렇구나. 그렇게 느껴지시는구나. 왜 그렇게 느껴지시는 것 같으세요?

나: 저한테 남은 게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허황된 것들을 쫒아다니다 보니 인간관계도 단절되고, 마음이 행복하지도 않고, 대단한 명예를 얻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뭔가 끊임없이 열심히 살았지만 남는 게 없는 기분이에요.

상담사: 그렇구나. 그러면 이런 것들을 추구하지만, 또 이런 것들이 별로라고 느끼는 마음도 있으니 두 가지 마음이 있는 거네요.

나: 네. 맞아요. 그런 것 같아요.


상담사: 왜 그렇게 열심히 하신 것 같으세요?

나: 음. 뭔가 제가 잘할 수 있는 분야인 것 같았어요. 재미도 있었고요. 처음 교육일을 시작했을 때는 제 천직이라고 떠들고 다녔어요. 그리고 최고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상위그룹에 속할 수 있을 거 같은 희망이 있었어요. 맨날 뭘 해도 중간 정도 가는 인생이었는데, 교육일을 하면 멋지게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상담사: 오! 그렇구나. 어떤 부분이 재미있으셨어요?

나: 아이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거요.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이 너무 좋았어요. 성취감을 느끼고요.

상담사: 예를 들면 어떤 것일까요? 구체적인 상황을 말씀해주실 수 있으세요?

나: 예를 들면요. 알파벳도 모르던 아이가 유창하게 영어로 말을 한다거나, 숟가락 드는 것도 힘들어했었는데 밥을 잘 먹게 된다거나. 그런 것들이요.

상담사: 아 그렇군요!

나: 재미있다고 생각했고, 또 열심히 살았는데, 늘 마음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올라오는 생각이 '화장실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였어요. 방광염을 달고 살았거든요. 비뇨기과 의사가 화장실 가고 싶을 때 절대 참으면 안 된다고 해서 제가 "바쁘다 보니 그게 잘 안되네요."라고 했더니 황당해하면서 "치료하려는 의지가 없네요."라고 하더라고요.

상담사: 어머나. 그렇게까지 힘들게 일 하신 줄 몰랐어요. 너무 힘드셨겠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하셨어요? 그 정도로 바쁘셨던 거예요?

나: 바쁜 건 맞지만, 사실 그 누구도 제가 화장실을 못 가게 막은 사람은 없었어요. 그냥 제가 스스로 정신없이 산거 같아요.


상담사: 그랬군요. 상담의 방향은 '자기 돌봄', '자기 이해', '자기 수용'이 되겠네요. 이건 문장 완성 검사지예요. 여기 문장을 읽어보시고 깊게 생각할 필요 없이 바로 떠오르는 내용을 적어주시면 돼요. 바로 생각이 안 나면 그냥 넘어가셨다가 나중에 다시 쓰셔도 됩니다. 다음 상담 때 가지고 와 주세요. 그리고 각 가족 구성원마다의 장점, 단점, 나와의 관계, 이렇게 세 가지를 적어오시면 좋겠어요. 상담에 도움이 많이 된답니다.

나: 네. 그럴게요.

상담사: 상담을 마무리하기 전에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혹시 오늘 불편했던 점이나 좋았던 점 있으실까요?

나: 불편한 건 없었고, 상담사님이 저와 비슷한 나이면 어쩌나 했는데, 그게 아니라서 좋았어요.

상담사: 아 그러셨어요? 나이가 비슷할까 봐 걱정하셨군요. 제가 머리 염색을 안 해요. 욕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하하.

나: 저는 보기 좋아요.

상담사: 그래요? 고마워요!


상담을 마무리하고 문 앞까지 배웅하는 상담사의 희끗희끗한 머리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상담사: 이건 그냥 제가 늘 하는 건데, 혹시 괜찮으시면 안아 드려도 될까요?

나: 네!

상담사: 다음 주 화요일에 봐요!


앞으로 아홉 번 더, 총 열 번의 상담을 진행하기로 했다. 오늘 한 시간 동안의 상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상담사는 심리상담은 3~4회까지는 오히려 마음이 더 불편할 수도 있고 악몽을 꿀 수도 있다고 했다. 눌려져 있던 것들이 꺼내져서 그런 것이니 그 시간을 잘 지내면 5회부터는 변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마흔을 앞두고 생애 첫 심리상담, 나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이전 01화 곧 마흔, 심리상담을 받기로 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