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24시간은 우리의 수 많은 행동, 생각, 감정들로 채워진다. 더없이 기쁜 날도 더 없이 슬픈 날도 있지만 온 종일 하나의 감정만으로 지속되기는 어렵다.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말라 죽을 것 같다가 조그만 미소에 다시 살아나고 얕은 생각에 분노하기도 한다.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일상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를 숨 쉬게 하는 짧은 시간을 찾아 그 속에 머물며 에너지를 채우는 것이다.
나의 첫 세계여행지였던 미얀마.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갔다기보다 우연히 포털검색창에서 마주한 사람들의 미소가 아이처럼 해맑았다. 글을 쓴 사람도 태고의 순수함을 간직한 마지막 나라로 묘사했다. 그 즈음 나는, 전쟁같은 직장 속에 말라비틀어진 풀쪼가리 같았다. 생명력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생명을 되살리는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점점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공항 출국장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기대반 걱정반 속에 도착한 미얀마는 무진장 더웠지만 무진장 소박한 나라였다. 소매치기 당한 글도 봤고 으슥한 곳에 끌려가 협박당한 사람의 후기도 봤지만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다. ( 그지 같이 입고다니긴 했다.) 국수 한 그릇에 500원, 진짜생리얼요거트가 800원이었다. 모든 사람들의 미소는 순박했고 야경 속에 비친 연인들의 모습은 행복해보였다.
그렇게 수도를 떠나 가장 기대했던 '인레'를 방문했다.
'기대'라는 감정도 혼자 오진 않았다. '실망'이라는 찰거머리 녀석이 들러붙어 있었다. 관광상품이 주력인 도시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상품을 팔기 위해 노골적으로 강요했고 불친절했다. 상대에게 친절해야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는 아니지만, 이전까지의 미얀마 사람들의 순박한 미소가 기본 디폴트값이 되어버린것인지 적응하기 어려웠다. 반나절을 뙤약볕에 쏘다니다가 실망과 짜증을 주렁주렁 매단채로 숙소로 가는 보트를 탔다.
" 저기, 어부들이야. 낚시하고 있어. "
석양을 뒤로한 채로, 전통을 수호하고 있는 ( 그 수호하는 모습을 관광상품으로 팔고 있는 ) 어부들이 보였다.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소리도 없었고 물살이 서로 어깨를 부딪치는 소리만이 주위를 가득 매웠다. 해는 저물어가 선선해졌고 더위에 찡그렸던 사람들의 표정도 온화해졌다. 모두들 가만히 나룻배에 앉아 그날 느꼈던 감정의 찌꺼기를 바다 저편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밀려내려간 감정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괜히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내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지금 이 짧은 20분이 내 마음과 하루를 정화시켜놓은 것 같았다.
< 나의 해방일지 > 에서 미정이가 그랬다.
"딱 5분만 행복한 시간, 살아갈 힘을 주는 시간을 채워요. 그게 내가 죽지 않고 사는 법."
어쩌면,
기나긴 지리한 일상을
100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오지 하나의 신체로 정신으로 인격체로 살아갈 수있는 힘은
정류장 도착하자마자 오는 버스와 지하철, 내 앞에서 난 자리, 누군가가 잡아주는 문, 누군가가 가득 채워놓은 복사 용지, 옆자리 동료가 내려주는 진한 커피 한 잔이 모여 나를 공격해오는 시간과 환영을 정화지켜주는데서 생겨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