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일어났는데도 개운하지 않았다. 영하로 내려가는 추위에 숙소는 전혀 단열이 되지 않았고 자는 내내 깼다 자기를 반복했다. 침낭 속에 넣어둔 핫팩은 어느샌가 딱딱해져 있고 온 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새벽같이 일어나 트래킹을 이어갈 준비를 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릴거라고.. "
포터의 재촉하는 소리에 몸을 이끌고 겨울 출발했다. 봄에는 날씨가 변덕스러워서 오전에 트래킹을 이어가고 낮에는 안개가 두터워 숙소에 머물러야했다. 이 과정을 7일을 반복했다.
이가 딱딱 부딪치는 추위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한국의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밤이 되면 그저 전기장판 뜨끈하게 틀고 귤 까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빌린 신발이 발에 꼭 맞지 않아 물집이 생기고 터뜨리고를 반복했다. 앉았다가 일어설 때면 아이구 아이구 곡소리는 그냥 났다. 내 나이 27살이었다. 그리고 안나푸르나가 가까워질수록 몸에 이상한 반응이 생겼다. 그저 피곤해서 생긴 두통인 줄 알았는데 눈알이 조금씩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별 신경 안썼는데 알고 보니 이게 고산병이었다. 호기롭게 타이레놀 몇 알 먹고 버텼다.
몸은 점점 힘들어졌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피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나푸르나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쌓인 눈은 점점 많아져서 발이 푹푹 빠지고 추위는 점점 더 매서워졌다.
흙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사방에는 눈만이 가득했다.
" 내일이면 안나푸르나를 볼 수 있겠어. " 포터가 씨익 웃었다.
숙소에서 밀크티 한 잔으로 몸을 녹이고 있던 차였다. 뜨거운 물도 나오지 않고 물 마저 귀한 곳이라 양치질과 세수만 겨우 했다. 몸은 점점 힘들어지는데 이상하게 기분은 더 좋아졌다.
추위도 어느샌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그리고 대망의 7일차. 안나푸르나를 향해 출발했다. 눈이 많이 쌓였기에 포터는 신경써서 우리를 안내했고 가는 길마다 저벅저벅 소리가 주위를 가득 매웠다. 간간히 들려오던 새소리는 어느샌가 멎어있었고 눈으로 뒤덮인 설산이 주는 고요함과 적막함으로 온 세상이 가득채워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나는 왜 완벽하게 여겨졌을까.
어지러운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벗어나 영원으로 향하는 인간의 발걸음이랄까.
오로지 신경쓰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나의 발걸음이었다.
주위의 시선, 타인의 평가, 과거에 대한 후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안나푸르나의 품 안에서 나에게 집중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무척이나 소중했다.
마침내 마주한 그 곳. 안나푸르나
지난 7,8일간 내 머릿속을 가득 매우고 있었던 그 곳. 안나푸르나
내 눈 앞의 그는 고고한 자태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과의 싸움을 이기고 끝내 여기까지 온 인간이라는 미생들을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맞이해주고 있었다.
내 몸을 가득 감싸고 있던 외투도 한 순간 덥게 느껴졌다.
장갑도 빼고 지퍼를 열어 안나푸르나의 공기를 한 껏 들이마셨다.
상쾌함은 그저 일부분에 불과햇다.
“ 내가 안나푸르나에 왔는데, 못 할게 뭐가 있겠어! ”
산을 오르는 내내 나를 괴롭혔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나는 현실에서 도망쳐 온 것이 아니라
현실의 답을 찾기 위해 세상을 탐구중인 것이라고.
아프리카까지 이어지는 150일간의 여행에서
나를 감싸고 있던 단단한 껍질이 깨어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지금도 도전을 앞둔 나에게 안나푸르나가 말해준다.
“ 일단 해봐. 여기까지 올라왔던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