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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 Oct 29. 2020

고모라는 이름의 엄마


2019년 7월 4일     


“하나, 라면이라도 끓여줄게. 생일인데 미역국도 못해줘서 미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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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으로 떠날 준비로 부산스러운 아침이었다. 그런 내게 고모는 아침부터 라면을 끓여줬다. 생일인데 선물도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며 차려준 밥이었다. 괜히 그렁그렁해지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라면을 후딱 먹고 집을 나섰다.     


고모는 내게 미안하다 말하지만 사실 나는 고모한테 평생에 걸쳐도 갚지 못할 은혜가 많다.      

고모와 함께 살면서 보고 배운 게 하나가 있다. 이것만 하지 않으면 더이상 나빠질 관계는 없다.      

‘절대 나의 안 좋은 상황들로 동정표를 얻으려 하지 말고 위로받으려 하지 말 것. 손해를 보더라도 항상 베풀며 살아갈 것. 지는 게 곧 이기는 것이고 베푸는 것이 곧 받는 것’     

고모가 내 곁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나의 보호자는 고모였다. 유치원 학부모 참관수업, 초등학교 운동회 등 친구들은 보호자로 엄마 혹은 아빠가 있었지만 내 곁에는 늘 고모가 있었다. 엄마 아빠가 보호자인 게 당연하듯 나에게는 고모가 보호자인 게 너무나도 당연했다. 나는 고모를 사랑했다. 나에겐 고모라는 이름의 엄마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상하게 느껴졌다. 고모를 엄마라고 부를 수 없음이 이상했고, 동네 아줌마들이 고모를 ‘하나 엄마’가 아닌 ‘우진 엄마’라고 부르는 게 이상했다. 친구들은 늘 ‘엄마’라고 부르는 존재가 내게는 없다는 게 점점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거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엄마’라는 사람을 추측만 할 뿐 나를 낳아준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나와 조금 닮은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어떤 이유로 영원히 아빠의 곁을 떠났다는 것.’ 이 두 가지가 내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보고 싶을 만큼의 기억조차 없었다. 슬프지도 않았다. 혹여나 그녀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 한들 너무 희미해서 기억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녀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그녀가 왜 나와 아빠의 곁을 떠났는지 묻지 않았다. 24살 즈음 돼서야 겨우 과거의 상황을 문득문득 묻는 나였다. 어쩌면 외면하고 살아온 나의 과거에 대한 궁금증이 그때부터 점점 커지기 시작했는 지도 모르겠다.     


고모와 고모부는 나를 사랑으로 보살펴줬다. 고모와의 삶이 행복하지 않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고모는 내게 늘 예쁜 옷을 입혀주었다. 피아노 학원, 영어학원, 방문 학습지, 미술학원 등 나를 위한 교육에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빠가 넉넉한 돈을 보내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늘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펴줬다. 그건 사랑 없이 절대적으로 불가한 일이었다. 그 삶이 그렇게 행복했던 건지. 그들과 헤어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를 7년간 보살펴준 그들의 품이 얼마나 소중하고 따뜻했던 시간이었는지. 이름만 고모였지 그녀는 나의 엄마였다. 보통 엄마들이 하는 모든 역할을 그녀는 고모라는 이름으로 대신해주었다. 우리는 생김새도 체형도 지성인 두피마저도 모두 닮았었다. 우리는 조카와 고모라는 이름의 남들과는 조금 다르고 조금 특별한 모녀지간이었다.          


당시 12개 정도의 동이 있는 빌라에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친척 동생과 함께 살았다. 고모는 그 집이 거의 신축일 때부터 살았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많은 친구들이 그 빌라에 살았었다. 위층, 아래층, 뒷동, 옆 동. 학원이든 학교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언제든지 동네 친구들과 신나게 놀 수 있었다. 경찰과 도둑, 땅따먹기, 공기놀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시간이 점점 늦어지면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갔고 당연하다는 듯 내일 밤에 또 만나자고 약속했다. 나는 이상하게 그 작은 헤어짐 조차 싫었다. 작게나마 밀려오는 아쉬움과 슬픔이란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어수룩한 저녁,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면 잘 놀다 왔느냐며 어서 씻으라고 늘 따뜻하게 말해주는 고모였다. 그러면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고양이세수와 몸에 물만 끼얹고 대충 물기를 닦아낸 후 후다닥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작은방에 들어가 티브이를 보다가 잠드는 게 고모네 집에서 지내는 어린 날 일상의 전부였다. 그러다 소변이 마려워 잠시 잠에서 깨면 안방에는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친척 동생이 나란히 자고 있었는데 그러면 나는  소변을 누고 나와 슬그머니 그 사이에 껴서 잠들곤 했었다.          


어느 날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내 기억 속 그때의 아빠는 참 자상했다.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우리 딸?”      


나는 ‘무서운 게 딱 좋아’ 만화책과 인형이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며칠 뒤에 만화책 세 권과 내가 생각했던 작고 예쁜 미미인형이 아닌 큼직한 곰인형이 고모 집으로 도착했다. 아빠에게 고맙다고 안부전화를 했고 그날 이후로 나는 대부분의 날들을 그 인형과 함께 잠들었다. 지금에서야 느끼는 건 고모와 함께 보낸 나의 어린 날은 참 평범하고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2학년 때였을까. 인터넷 게임 ‘큐플레이’를 하다가 전화 한 통이면 게임머니를 잔뜩 충전해준다는 말에 나는 상대방이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그렇게 3번의 전화를 마쳤다. 하지만 게임머니는 아무것도 충전된 게 없었다. 그 후로 며칠이 흘렀고 그 전화 사건이 잊혀갈 때 즈음 그 달 전화 요금이 10만 원이 넘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시가 2003년쯤이었으니 10만 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랬다. 나는 게임으로 전화 사기를 당한 거였다. 고모한테 호되게 혼난 후 어린 마음에 고모가 무서워졌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알고 고모의 얼굴을 볼 면목도 없어졌다. 그래서 우발적으로 내뱉어 버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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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 나 제천 보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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