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제가 안아드릴게요.
풍족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힘들지도 않았다.
아마도 쉬지 않고 새벽까지 운전대를 잡으셨던 아버지, 그리고 100원짜리 하나 허투루 쓰지 않은 어머님 덕분이었다.
당신들에게는 엄격한 잣대로 살아오시면서, 자식들에게는 관대했다.
구김 없이 자랐다. 형과 나.
아버지는 한 번도 나를 품 안에 담지 않으신 무뚝뚝한 분이셨지만 친구처럼 늘 다정하셨다. 내 생각을 이야기 할 때면 절대 말을 끊지 않으셨고, 다 듣고 나서는
"그런데, 이렇게도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쉽게 설명해 주셨다.
배움은 짧았지만 삶에 모든 순간이 지혜로웠다. 아내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했다.
초등학교 3학년 그렇게 갖고 싶어 하는 가수 현진영의 후드티를 찾기 위해 광주 시내 지하상가를 하루 종일 누볐다. 그때 아버지는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으셨다. 정말 힘들고 지치셨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끝끝내 내가 원하는 걸 찾으셨다.
22살. 군대를 갔다. 아버지는 군대 간 아들을 보면서도 울지 않으셨고 따뜻하게 안아주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던것처럼.
그런 아버지가 군대 간 아들이 보고 싶어 내 방에서 펑펑 우셨다는 어머니의 이야길 들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소방관이 되고 교대 근무가 끝난 뒤, 집에서 자고 있으면 아버지는 200만 원짜리 중고차 SM5를 세차장으로 끌고 가 깨끗하게 닦고 정비까지 해주셨다.
그 덕분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차를 깔끔하게 탄다는 이야길 들었다. 가끔 차가 더러울 때면 아버지의 세차가 그립다.
아버지의 사랑표현은 그런 거였다. 끌어안고 뽀뽀하는 사랑이 아닌 아들이 필요로 하고 아들이 원하는 걸 채워주는 사랑.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항상 고마워요!
형과 나는 급식 세대가 아니다. 한마디로 도시락을 싸야 했던 학창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셔서 점심 저녁 각각 다른 반찬으로 매일 도시락을 세 개씩 준비해 주셨다.
형 두 개, 나 하나
아침마다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던 식기소리. 고소한 기름 냄새며 갓 지은 밥 냄새가 지금도 코에 전해진다.
오늘도 자식을 위해 도시락을 싸주는 그 자체가 어머니의 사랑임을 알 수 있었다.
내 몸과 마음.. 아니 우리 가족 건강을 지켜주신 건 아마도 어머니가 해주신 집밥 덕분이다. 집밥!
소방관 시험을 준비하던 20대 중반, 주말에는 어머니의 특식이 있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3층이었던 집을 성큼성큼 올라갈 때쯤 1층부터 전해지는 고소한 기름냄새에 오늘은 김밥임을 오늘은 고기임을 오늘은 카레임을 알 수 있었다.
그게 벌써 17년 전 일이 됐다.
아버지와 다르게 애정이 많으셨던 우리 어머니. 아들을 바라보면서 보기도 아깝고 늘 자랑스럽다며 아들에게 수없는 말과 행동으로 사랑을 주셨다. 우리 엄마. 우리 엄니. 그런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꼭 성공하고 싶었다.
어머니의 기대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지금 행복한 가정을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
자주 찾아뵙고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게 늘 죄송할 뿐이다.
추석을 앞두고, 오늘 갑자기, 그냥 문득,,,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떠오른다.
“엄마! 엄마가 해 준 김밥이 먹고 싶다”
“아빠! 이제 제가 안아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