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향한 질문
어느새 밤바람이 선선해졌다. 불과 몇 시간 전인데, 한낮의 땡볕과 무더위가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진다. 상쾌한 바람이 피부를 스치자 연관 검색어처럼 단어 하나가 떠오른다. 살아야겠다. 폴 발레리의 시구이다.
바람이 인다…… 살아야겠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 폴 발레이의 <해변의 묘지> 중에서
피부를 스치는 바람처럼, 사람은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것에서 불쑥 '삶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1997년 영화 [체리향기]에서 노인은 '달콤한 체리'에서 삶의 의욕을 느낀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한 중년 남자 '바디'는 수면제를 먹고 묘지 속에 누운 자신의 위로 흙을 덮어 줄 사람을 찾는다.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고 부탁하지만 군인도, 신학도도 단호하게 거절한다. 유일하게 박물관에서 동물 박제를 하는 노인이 받아들이는데, 노인은 바디에게 자신의 경험을 들려준다. 오래전 자신 역시 스스로 생을 끝내기 위해 체리나무 위로 올라갔지만, 탐스럽게 익은 체리를 먹다가 마음이 바뀌어 집에 돌아왔다고...
- 영화 [체리향기]의 줄거리
영화는 '바디'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보여주지 않지만, 그는 아마도 그날 밤 묘지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 같다. 만약 나였다면 '죽을 때 죽더라도 다시 한번 체리를 먹어보고 죽자'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스트레스 쌓이고, 피곤하고, 화나고, 속상하고, 억울한 일이 끊이지 않는 것이 인생이지만, 찾아보면 살고 싶게 만드는 것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나의 '바람'
나의 '체리'는 무엇일까?
웃게 해주고 싶다. 살아야겠다.
딸은 샤워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곤 한다. 기분 좋은 꿈을 꾸는지 때때로 잠꼬대로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딸이 계속 그렇게 노래를 흥얼거리고, 계속 웃음의 잠꼬대를 쏟아낼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야겠다.
먹고 싶다. 살아야겠다.
하나의 음식에 꽂히면 물릴 때 주야장천 그 음식만 먹는다. 딸이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나의 취향이다. 최근에 딱 내 스타일의 식당을 발견했다. 나는 아직 그 식당의 음식에 물리지 않았다. 내일도 먹고 싶다. 열심히 살아야겠다.
궁금하다. 살아야겠다.
한 때 '피카소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아인슈타인으로 사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몹시 궁금했다. 지금도 궁금하다. 범인인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천재들의 시선, 천재들의 삶. '이번 생을 부지런히 살고 또 다음 생을 또 다음 생을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 이해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라는 발랄한 상상을 하며 열심히 살기로 한다.
읽고 싶다. 살아야겠다.
사다 놓고 아직 읽지 못한 책이 너무 많고, 읽고 싶은 책도 너무 많고, 읽다가 문득 멈추게 되는 구절도 너무 많다. 역시 살아야겠다.
저는 친절하지 못했던 걸 후회하면서 정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관계성 후회를 접하면서 제 행동에도 변화가 생겼어요. 예전에는 어색하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잘 다가가지 못했어요. 상대방도 개의치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제 생각이 틀렸어요. 언제고 상대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이 답입니다.
- 독서모임에서 소개받아 요즘 읽고 있는 책 '김지수의 인터뷰집 <위대한 대화>' 중에서
쓰고 싶다. 살아야겠다.
운동 후 땀에 흠뻑 젖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난 선선한 바람, 이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글을 쓰고 싶었다. 게으름 피우기 딱 좋은 금요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노트북을 챙겨 들고 카페로 나와서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는 것이 힘들지만 행복해서, 여전히 쓰고 싶은 글들이 너무 많아서 열심히 살아야겠다.
생각해 보니 가고 싶은 곳도, 배우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일도, 좋은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은 것도, 또 아직 전하지 못한 감사의 인사도 많다.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너무 많다. 도돌이표를 찍는 기분으로 살다가 문득 이 수많은 이유를 찾아내고 나니 뭔가 에너지가 샘솟는 느낌이다.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