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말해주는 단어
늘 하던 일인데도 유난히 하기 싫은 날이 있다. 그래도 몸을 꾸역꾸역 일으킨다. 한 번 안 하게 되면 두 번 세 번 안 하게 되고, 어느 순간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공든 탑은 쌓아 올릴 때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무너질 때는 한순간이면 충분하다.
'습관'도 그렇다. 좋은 습관 하나를 만들려면 최소한 100일 이상 공을 들여야 하지만, 무너질 때는 며칠이면 족하다. 일단 습관을 만들어두면 그다음부터는 저절로 굴러갈 거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세상에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가 노력의 결과이다. 힘들게 만든 '운동하는 습관'을 유지하기 위해서 억지로 운동화를 챙겨서 헬스클럽으로 간다. 일단 운동화를 챙겨서 집을 나서면 도중에 되돌아가지는 않으니 일단은 성공이다. 하지만 유혹은 끊이지 않는다.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으니까 10분 뛰고, 중간에 2분씩 휴식을 취하는 코스를 선택하자' 1차 유혹부터 이기지 못하고 넘어가고 말았다. 비교적 수월한 코스를 선택하고 달리기를 시작했지만, 하기 싫다는 생각 때문인지 몸이 무겁다. '처음 10분만 달리고, 나머지는 그냥 걸을까?' 2차 유혹이 찾아온다.
이렇게 쉼 없이 유혹이 올라올 때, 나의 응급처방은 '텔레비전'이다. 평소에는 운동할 때는 웬만하면 텔레비전을 보지도 않고, 음악을 듣지도 않는다. 오로지 몸에 집중한다. 공부할 때 집중을 해야 공부가 잘 되듯이, 운동할 때도 몸에 집중해야 자세를 바로 유지할 수 있고, 근육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중도 포기할 핑계만 찾는 날에는 어쩔 수 없이 텔레비전을 켜고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린다. 텔레비전에 한 눈 팔다 보면 이런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켜자 '알쓸별잡' 재방송을 하고 있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고등연구소'를 방문한 김상욱 교수는 아인슈타인을 말해주는 4개의 단어 '물리학자, 인도주의자, 교육자 그리고 이민자'를 설명하고 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를 말하는 4개의 단어로 뭘 꼽을 수 있을까?' 힘든 것도 잊어버리고 달리는 내내,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나는 끝내 4개를 다 떠올리지 못했다.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는 '엄마'였다.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라고 했다. 나에게는 그 8할이 '딸'이었다. 딸을 키우면서 '사랑'이 나무처럼 쑥쑥 자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고, 아이가 제 힘으로 일어나 한 걸음을 떼어 놓는 것이 기적처럼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도 배웠다. 또 기다리는 법도 배우고, 책임지는 법도 배우고, 경청하는 법도 배우고... 매일이 배움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족한 엄마이지만, 내 삶에서 가장 큰 의미를 지니는 역할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반드시 4개를 채워야 할 이유는 없지만, 나를 말할 수 있는 단어를 고민해 보는 것은 꽤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단어를 찾는 며칠 내내 나는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고 있었고,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고민하고 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