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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문 Jan 04. 2024

등잔 밑이 어두웠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돌이켜보니 그동안 이사를 참 자주 했다. 그리고 이사를 하면 으레 동네 순례에 나서곤 했었다. 분위기 좋은 카페가 있는지, 만화가게나 도서관이 있는지, 단골 삼으면 좋을 밥집이나 술집이 있는지, 운동하기 좋은 공원이 있는지... 부지런히 찾아보곤 했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면 왠지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혼자 뿌듯해하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 왔을 때는 그 과정을 생략했다. 수험생 딸이 있었고, 일이 한꺼번에 몰려 정신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한참 지나 여유가 생겼을 때는 이미 자주 찾는 카페와 도서관이 있어서 새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몇 달 사이에 새삼 우리 동네 재발견의 재미를 누리고 있다. 


옛말 틀린 것 하나도 없다더니, 역시 등잔 밑이 어두웠다. 그리고 알고 보니 어두운 그 등잔 밑은 참 맛있고, 따뜻하고, 예뻤다.   


등잔 밑 1. 단골 식당이 생겼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숱하게 지나다니던 길에서 찾아낸 식당이다. 그날도 지하철역으로 가다가 무심히 시선을 돌렸는데, 2층에 달려있는 'kitchen'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배도 고프고, 궁금하기도 해서 들어갔다. 깨끗하고, 친절하고, 맛있고, 푸짐했다. 식당이 갖춰야 할 덕목은 다 갖추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난 단골이 됐다. 밥시간에 가면 많이 기다려야 하기에 식사시간을 피해서 다녀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좋다. 

 

그런데 맛이 변했다. 얼마 전 늘 먹던 메뉴를 포장해 와서 먹었는데, 알고 있던 그 맛이 아니었다. 간이 맞지 않아 싱거웠고, 기름기가 지나치게 많아 느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 후 나는 그 식당을 또 찾았다. 불과 몇 달이지만 그동안 쌓인 신뢰가 있으니 두 번째 기회는 주고 싶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맛은 회복되어 있었다. '며칠 전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너무 바빠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직도 궁금하다. 물론 여기서 핵심은 '맛이 변한 이유'가 아니라 '신뢰가 쌓이면 한 번쯤 실수해도 두 번째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등잔 밑 2. 나는 붕세권에 살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붕어빵 중에서 '가장 맛있는 붕어빵'을 파는 가게가 우리 동네에 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 달콤. 완벽하다. 팥과 슈 두 가지 종류가 있어서 기분 따라 골라 먹을 수 있다. 체인점이니 다른 노점에서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반죽과 속'을 사용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을 때마다 감탄하게 만든다. 주인에게 비결을 물었더니 딱 한 문장으로 설명했다. "집에서 정말 많이 구워봤어요"  역시 맛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노력 없는 결과는 없다. 


등잔 밑 3. 일출을 볼 수 있는 공원이 있다. 조깅을 하기 위해서 종종 찾는 축구장이 몇 달간 공사가에 들어가면서 출입이 금지됐다. 아쉬운 마음에 '산책할 곳이 없을까?' 찾다 보니 뒤에 어마어마한 공원이 있었다. 요즘은 눈길 빙판길이라 다소 불편하지만, 날씨가 풀리면 산책의 즐거움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이용해 보지는 못했지만 작은 카페도 있고 도서관도 있어서 재미가 쏠쏠할 것 같다. 무엇보다 올해 새해 첫날의 일출을 이곳에서 맞았다. 바다나 강, 산이 아니라 아파트 숲을 배경으로 떠오르는 일출도 근사했다. 역시 불평할 시간에 다른 방법을 찾아오면 기대 이상의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아직도 내가 발견하지 못한 등잔밑의 아름다움이 더 있을 테니, 틈 날 때마다 산책 삼아 동네 순례에 나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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