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없는 성장은 없다
일주일 간의 단식에 도전하다!
수년 전에 일주일 간의 단식을 해본 적이 있다. 두 번째 단식을 했을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지만, 첫 번째 단식은 왜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내가 맡고 있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출연자로 왔던 분이 자신의 단식 경험담을 들려주었고, 나는 그 세계가 너무 궁금해서 덜컥 일주일간의 단식프로그램을 신청했다. 평소처럼 일상을 유지하면서 단식하는 프로그램이었기에 일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더 쉽게 결정했던 것 같다. 실제로 일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집중력은 더 좋아졌다. 숙면을 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걷기 운동 정도는 충분히 같이 할 수 있을 정도로 체력적으로도 딱히 힘들지 않았다.
그때 동료들은 이구동성 '왜 고생을 사서 하냐'라고 했지만, 사서라도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사서 했다. 아무도 시킨 사람도 없었고, 나 스스로 내 돈 내고 했으니까.
단식 진행 방식은 간단했다. 물은 수시로 마시고, 비타민C가 풍부한 감잎차와 산야초 차를 하루에 3~4잔 마셨다. 그 사이사이 죽염을 아주 조금씩 6번 정도 먹었다. 전해질 균형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매일 목욕탕에 가서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목욕을 하고, 창문을 열어서 풍욕을 하고, 관장을 하고, 복부 찜질을 했다. 의외로 챙길 것들이 많았고, 이것들을 부지런히 챙기다 보니 어느 순간 일주일이 지나갔다.
온몸으로 느낀 사과 맛
단식을 한 후에는 단식 기간의 2~3배에 걸쳐 보식을 해야 한다. 아주 아주 묽은 미음으로 시작해서 서서히 양을 늘려가면서 일상식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서 단식보다 보식 더 힘들다는 말도 한다. 실제로 아예 안 먹는 것보다 아주 조금 먹고 참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열흘 만에 일상식으로 돌아가면서 보식에는 실패하고 말았지만, 일주일 간의 단식 후에 먹었던 사과 맛은 아직도 상상하게 기억난다. 세상에 사과가 그렇게 맛있는 과일인 줄 몰랐다. 나의 온몸이 혀가 된 것 같았다. 묵은 때를 벗어버린 나의 혀는 모든 식재료의 맛을 너무나 예민하게 느꼈고, 한동안은 음식을 먹을 때마다 감탄했었다. 물론 안타깝게도 그 기간은 몹시도 짧았고 나의 혀는 다시 온갖 화학조미료와 인스턴트에 길들여져 갔지만, 사과 본연의 맛을 체험해 본 것만으로도 일주일 간의 단식은 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고생이 있어야 즐거움도 있다!
돌이켜보니까 사서 한 고생들이 꽤 있다. 어린 딸과 함께 일주일 정도 제주 올레길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뭐 그리 열심히 걸었는지, 나의 발은 물집 투성이었다. 다음 날 길을 나서기 무서울 정도였다. 반면 어린 딸은 자고 나면 생생해져서 늘 첫날 같았다. '밤 사이 나 몰래 산삼이라고 먹고 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반면 나는 하루하루 지쳐갔고, 일주일 후 내 발바닥은 성한 곳이 없었다. 시간과 돈을 들여서 고생을 사서 했지만, 딸과 함께 하루 종일 걷는 것이 즐거웠다. 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그 정도 고생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딸도 즐거웠을까요?"라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해냈다'는 말을 하는 내가 너무 좋았다!
지난해에는 설악산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 삼보일배로 다녀왔다. 이 얘기를 하면 하나 같이 묻는다. "도대체 왜?" 그러게 말이다. 도대체 왜 그 고생을 사서 했을까? 일단은 궁금했다. 그렇게 힘들게 봉정암에 올랐을 때 어떤 기분일지. 가슴 벅찬 감동 같은 게 밀려올 줄 알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그저 '해냈구나,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해냈다'는 이 말을 하는 내가 너무 좋았고, 앞으로 또 해낼 수 있겠구나 싶었고, 해내고 싶어졌다.
성장은 고통 뒤에 따라온다!
고통을 통한 개선이 진화의 본질이듯이, 모든 성장과 발전은 고통을 전제로 한다. 고통을 생략하면 성장도 없다. 그러니 기꺼이 고생을 사서 해야 한다. 지금 당장 편하고 달콤한 것들은 어느 순간 독이 되어 돌아오지만, 지금의 고생은 즐거움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