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그릇을 들고 비를 맞으러 나가는 사람처럼
나는 빈 종이를 두 손으로 소복이 받잡아들고
때마침 몰아치는 언어의 비 속을 걷는다
연일 따사로운 햇빛에 바삭하게 말라가던 종이가
단어들로 촉촉이 젖는다
모처럼 내리는 비가 반가워
때마침 계획이 없던 나는
하루 종일 비 속을 거닐며
연거푸 새 종이를 꺼내어 적셨다.
마침내 돌아와 층층이 젖은 종이를 잘 개키어 둔다
그것은 건조하고 파삭한 날
고단한 삶에 잠 못 들 때에
서랍에서 꺼내어와 코를 데어 맡으면
비 향기 가득한 그 날의 환상을 다시 보게 해 줄 것이다.
또다시 비를 기다리며 나는 종이를 곱게 개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