묽은 커피를 마시며
믹스커피를 타서 한 모금을 마셨다.
마시는 순간 앗차. 물을 너무 많이 넣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다.
차라리 물을 적게 넣었다면 더 넣으면 되었지만, 이미 넘어버린 물은 돌이킬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믹스 하나를 더 넣으면 어떨까 라는 순간적인 물음에 다이어트라는 이제는 식상해져 버린 오래된 타이틀과, 점심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과, 너무 양이 많아져버릴 커피와, 이런 맛없는 커피도 오랜만이라는 생각에 한 모금, 두 모금 넘기다가 반 넘어 넘기는 과정에서 겨우 물 많이 탄 커피 때문에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묽은 커피로 인해 떠오른 몇 가지 생각들은 고구마 줄기처럼 다음 생각을 잡아당겼고, 맛있게 탄 커피가 줄 수 없는 많은 추억들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그중 하나는 교회 청년부에 대한 것이었다. 작은 정수기 앞에서 한 스푼 두 스푼 망쳐버린 커피를 고쳐보겠다고 둥글게 모여 서로 낄낄거리던 기억이 벌써 추억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 교회 식당에는 어째선지 편리하게 찢어내는 믹스커피가 없었고 전통적인 커피의 삼요소 -커피, 설탕, 프림- 통 이 있었는데, 예배를 마치고 집사님들 권사님들이 만들어주신 최고 맛있는 식사를 하고 나면 다들 그 커피 테이블에 모여 서로 본인들이 세계 최고의 커피를 맛 보여주겠다며 커피 배틀이 벌어졌다.
커피, 프림, 설탕을 마구잡이로 섞어 뜨거운 물을 부어 한입 마시고는 크하- 진짜 이맛이다! 하며 서로에게 시음을 강권하며 모 요리만화 뺨치는 묘사 실력으로 자신의 커피를 소개했었다. 자신의 커피가 얼마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며 둘이먹다 셋이 죽어도 모를 맛인지. 어떻게 보면 그저 커피였을 뿐인데 다들 서로의 배합을 겨루며 어찌 그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워했었던지...
어느새 다 식어가는 밍밍한 커피 한 잔을 들고 행복해하는 나를 보며 커피에 물을 많이 넣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지막 모금을 마시며 이 커피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니, 세상에 밍밍한 커피만큼이나 사랑스럽고 감사할 것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게 되어서 그만 또 감사하다고 연거푸 기도하고 말았다.
언젠가 살면서 마시게 될 밍밍한 커피들에는 분명 오늘의 감사한 추억까지 담기게 될 것이다.
커피를 타는 모든 순간들에 감사와 축복이 깃들기를.
글이 마음에 드시거나 SF 소설을 좋아하신다면, 밀리 오리지널로 출간된 SF소설 [Dome - 기억 정렬 붕괴] 도 읽어봐주세요.
돔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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돔 | 기억정렬붕괴 part2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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