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4.13. 푸노, 페루(D + 66)
새로운 동행 P와 함께 아레키파에 가서 전설의 새라 불리는 콘돌을 봤다. 그리고 볼리비아로 넘어가기 위한 페루의 국경 도시 푸노에 도착했다. 이곳은 ‘배가 뜰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호수’ 티티카카로도 유명한 곳. 관광객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우리는 티티카카 호수 위에 갈대로 만든 인공 섬인 우로스 섬 투어까지 마쳤다. 그렇게 페루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이제는 정말 이 나라를 떠날 시간이 왔다.
리마에서 첫날 도착하자마자 샀던 한 달짜리 유심칩은 어느새 기한이 넘어가 작동을 멈췄다. 처음 세 달 정도로 계획하고 있던 여행으로 치자면 벌써 두 달가량이 지났다. 머무를 만큼 머물렀다 싶었는데도 막상 떠나려니 너무 짧았다. 언제까지가 될진 모르겠지만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자 했다. 딱 잡아 표현하기엔 복잡 미묘한 마음으로 국경을 넘기 전날 밤.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움직이기 싫었던 페루의 마지막 저녁 식사는 하필 대형 복합 쇼핑몰 안에 입점해있는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 뱀보스(BEMBOS)에서 먹은 햄버거. 그리고 그곳은, 누군가에겐 특별한 추억도 누군가에겐 일상이라고, 내겐 다시없이 떠나기 싫은 여행지도 누군가에겐 평범한 삶의 터전이라는걸 깨닫기 너무 좋은 곳이었다.
커다란 홀에 빼곡히 놓인 테이블에 앉아 햄버거를 기다리는 동안 주변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온 학생들, 직장인들, 가족들이었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하루가 어땠을지 쉽게 속단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저녁을 먹기 위해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은 그냥 그대로 표현할 수 없이 평범해 보인다.
아마 바로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나도 저런 모습이었겠지. 퇴근길 시내의 맛집을 찾아 친구, 연인,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웃고 신세 한탄을 하고 위로를 받고 놀러 갈 계획을 세우고 내일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언젠가 꿈에서나 겪어본 일이었던 것 마냥 그때의 내가 너무 이질적이다. 문득 나는 정말 멀리까지 떠나왔구나 싶었다.
못할 것 같던 여행을 떠나고, 전설인 줄 알았던 꿈의 장소에 다녀오고, 아무 계획도 할 일도 없이 시간을 보내고, 상상도 해본 적 없던 모험을 하고. 매일이 신나고 즐거웠는데 갑자기 아득해졌다. 난 원래 행동보단 생각이 앞서고 도전보단 고민이 많은 소심한 사람이었지. 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잠시 미뤄두었던 걸까. 잊고 있던 마음들이 커다래진다. 일상을 마친 잔잔한 표정의 사람들을 보는데 나도 다시 저런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솔직하게 말해서 두려웠다.
세계여행 500일이 훌쩍 넘었다는 옆자리의 P는 동남아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지를 거쳐 이제 마지막 코스로 아메리카 대륙에 넘어온 친구다. 늘 옮겨 다니며 짐을 풀었다가 다시 싸고, 새로운 곳의 정보를 미리 파악하고, 또 그곳에 적응했어야 할 장기 여행자. 남미에 머문 날짜만으론 나보다 짧아 낯선 언어나 생활 등에는 아직 덜 익숙해 보였지만, 여행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그 아인 이미 떠남과 헤어짐이라는 이벤트가 훨씬 일상에 가까웠을 거다.
너는 왜 여행을 왔어? 이 여행이 끝나면 무얼 하고 싶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질문을 그대로 삼켰다. 순간에는 어떤 상황에도 무덤덤한 표정을 잃지 않는 그 친구에게 지금 내 마음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떠나기 싫었던 내 마음은 벌써부터 돌아감이 두려웠던 것은 아닌지, 작아진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와 아빠, 초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까맣고 눈망울이 크던 조그만 아이. 세 가족은 동그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돌아가면 다시 저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아니, 저런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나는 또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아니, 나는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아무것도 바랄 수 없었던 페루의 마지막 밤이 흘러갔다.
*푸노(PUNO)
페루 남쪽에 있는 도시로, 티티카카 호수의 서쪽에 위치한다. 여행자들에겐 티티카카 호수와 갈대로 만든 인공 섬 우로스 섬 등으로 유명한데, 페루 내에서도 남쪽 지역의 상업과 교통의 중심이 되는 꽤 큰 규모의 도시라고. 국립대학의 소재지라는 것도 빠지지 않는 자랑거리 중 하나다. 그러고 보면 도시 크기 자체도 꽤나 큰 편이고 대형 복합 쇼핑몰과 커다란 경기장 등도 있는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곳이 해발 3,850m에 달하는 꽤나 높은 고산도시라는 것이다.
티티카카 호수는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지대로, 푸노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볼리비아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버스는 호수변을 따라 돌다가 국경에서 멈추고, 승객은 모두 내려 걸어서 국경을 넘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버스를 타고 달리면 볼리비아 쪽에서 티티카카 호수와 맞닿아 있는 도시인 코파카바나에 도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