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거시 보드게임 <글룸헤이븐>
한동안 금요일마다 보드게임에 대한 글을 한 편씩 써서 올리는 재미가 있었는데 이번주엔 글을 쓰지 못했다. 요즘 용병 활동을 하고 있는 도시 글룸헤이븐에 갔다가 생각보다 늦은 시간까지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던전의 몬스터를 모두 잡아 퀘스트를 완수했고, 나는 경험치를 얻어 레벨업도 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우리 팀에서 유일하게 보물 상자를 획득했다. 우리 팀에서 여전히 체력은 내가 제일 꼴찌지만, 그래도 내가 제일 부자다. 다음 시간에 다시 마을에 돌아가면 체력을 보완할 수 있는 아이템을 왕창 사야지.
글룸헤이븐은 동명의 보드게임의 배경이 되는 도시다. 지난해 겨울이 시작될 무렵 장장 95개의 시나리오로 구성된 이 게임을 함께 할 팀이 꾸려졌고, 시간이 날 때마다 모여서 글룸헤이븐으로 떠나고 있다. 연말을 지나며 파티원 간의 일정을 맞추기 어려워 자주 만나진 못했기에 시나리오는 아직 시작 단계다. 하지만 나름 성공적으로 전투를 수행해 나가며 경험치를 쌓고 도시 내의 명성도 조금씩 높여가고 있다. 마치 PC PRG 게임 같은 이야기라고? 이렇게 오랜 시간 긴 시나리오를 보드게임으로도 진행할 수 있냐고? 나도 처음엔 신기했다.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쌓아나가는 방식의 보드게임이라니.
보드게임에 종종 '레거시'라는 이름이 붙는 것을 볼 수 있다. 보드게임에서 레거시란, 앞에서 했던 플레이가 이후의 플레이에도 영향을 미치는 시스템을 말한다. 이번 판에서 내가 A스킬이 아닌 B스킬을 익히기로 결정했다면, 나는 앞으로도 이 게임에선 B스킬만 사용할 수 있다. 두 갈래로 나뉜 갈림길에서 왼쪽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면, 우리는 앞으로 계속 왼쪽 길에서 펼쳐지는 시나리오만 보게 된다. 마치 등장인물의 행동에 따라 이후의 사건이 달라지는 소설이나 인터렉티브 드라마 같은 모습이라고 할까. 한 편의 시나리오가 끝나고 오늘의 게임을 마쳤다면 플레이어들은 변화된 상황이나 캐릭터의 상태를 그대로 '저장'한다. 그리고 다음에 다시 모였을 때 저장한 게임을 '불러'온다. 앞서 저장해 놓은 상황과 상태 그대로 게임은 다시 시작된다.
레거시 보드게임은 2016년 무렵 처음 등장했다. 시작은 <팬데믹 레거시>. 이제는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아는 그 팬데믹의 과정을 다루는 게임으로, 실제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팬데믹을 막기 위한 몇 년간의 사투가 게임으로 잘 압축되어 있다고 한다. '있다고 한다'라고 적은 이유는, 너무 해보고 싶었는데 아직 난 못해봤기 때문이다. <팬데믹 레거시>도, 지금 내가 시작한 <글룸헤이븐>도 출시 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오랜 시간 명성을 떨치고 있다. <글룸헤이븐>의 경우 '발매 이래 현재까지 1위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바로 그 게임'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데, 실제로 출시 이후 보드게임 업계의 상이란 상은 다 휩쓸고 2019년 우리나라에 한글판이 발매되었을 때도 구매 예약권이 3시간도 안 돼 완판 되었다는 기사까지 올라왔었다.
하지만 이런 인기에도 불구하고 레거시 보드게임은 좀처럼 도전하기 힘들다. 가장 큰 문제는, 모든 보드게임이 그렇겠지만 사람을 모으기 어려워서다. 특히 레거시 게임은, 게임의 시나리오에 따라 길면 1년이 넘게 플레이를 이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일단 모임이 1년 동안 잘 유지되기도 힘들어서, 결국 엔딩까지 못 보고 중간에 터지는 경우도 많단다) 그러니 우선 파티원 모집에 신중해진다. 할 사람을 찾는 것도 어렵지만, 그 찾은 사람이 나와 잘 맞아야 또 오래 함께 보며 게임할 것 아닌가. 잘 맞는 사람끼리 모였더라도 각자의 일정이 너무 바쁘면 또 안 된다. 자주 만나기 어려우니 그만큼 게임을 자주 할 수 없어 몰입도와 애정이 떨어지고 말 것이다.
같이 <글룸헤이븐>을 하자는 말에 덥석 알겠다고 한 건,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까 싶어서였다. 그리고 마침 꾸려진 파티원들도 나랑 플레이 스타일이 꽤 맞는 편이라 여겨지는 사람들이었다. 내게 처음으로 협력게임의 재미를 알게 해 준 사람들. 역시나 (아직까지는ㅎㅎ) 게임을 하면서도 자기 몫에 욕심내기 보다는 밸런스를 중요시 여긴다. 이 게임을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건 모인 사람들이 다 자잘한 에피소드를 좋아한다는 거다. 메인 시나리오도 물론 중요하지만 마을과 여로에서 펼쳐지는 소소한 이벤트를 열어보는 재미에 빠져 이 게임을 더 열심히 하고 있다. 게임을 하러 모이는 날이면 초콜릿이며 귤이며 서로 간단한 주전부리를 챙겨오는 것도 생각보다 잘 맞는 점이었다.
함께 시나리오 한 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은 정말 긴 여행이라도 함께 떠났다 돌아오는 길 같다. 우리끼리 나눌 수 있는 에피소드도 하나씩 늘어난다. 소소한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파티원들의 성향을 알아가게 되는 것도 재미다. 지금까지는 내가 생각보다 호전적인 성향으로 나머지 보다 모험을 즐기는 경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카드 플레이를 할 때마다 제일 고민이 많아 자꾸 시간을 끄는 것도 나다.
생각해보면 <글룸헤이븐>은 처음에 룰 설명을 듣고 나면 비슷한 플레이 방식의 반복이라 크게 어렵지도 않은 것 같다. (물론 처음엔 세계관과 여러가지 잔룰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린다.) 인원도 2-3명 정도만 모이면 즐길 수 있다. (1-4인용 게임으로 3인 베스트란다. 그러고보니 심지어 혼자서도 할 수 있다!) 뭐랄까, 가족게임으로 좋을 것 같은 느낌? 한 판에 끝나지 않으니 시간을 정해 계속 모여야 하고,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며 상대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모여 있으니 자연스레 대화도 나누고. 물론 이런 류의 게임은 다 머리를 좀 굴려가며 해야 하기에 게임에 대한 흥미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아무튼 이렇게 적고 나니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레거시 게임이라니...! 언젠가 함께 사는 사람이 생긴다면 꼭 한번 도전해 보기로 목표를 세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