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 <데이 브레이크>
연일 들려오는 산불 소식에 마음이 무거운 요즘이다. 언제부턴가 재해를 다루는 뉴스가 늘어나고 있다. 산이었다가 바다였다가 때로는 공기가 때로는 기후 문제가 갑작스레 수면 위로 올라오곤 한다. 징조가 있었지만 어느 타이밍에 어떤 방식으로 일이 터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자연의 예측 불가능성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지구에 닥친 위기를 심각하게 말하면서도 한편으론 남일처럼 방관하고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갑자기 눈에 보이는 사건으로 터지기 전까진 쉽게 와닿기 어려우니까.
2019년에 출판된 <플랜 드로다운>이라는 책이 있다. ‘기후변화를 되돌릴 가장 강력하고 포괄적인 계획’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행동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드로다운’이란 기후 용어로, 온실가스가 최고조에 달한 뒤 매년 감소하기 시작하는 시점을 말한다. 책의 저자는 드로다운 달성을 위한 솔루션을 에너지, 식량, 여성, 건축과 도시, 토지이용, 수송 체계, 재료, 미래에너지 분야로 나누어 연구하고 분석했다. 나는 이 책을 직접 읽지는 못했지만 일 때문에 기후 위기 관련 강의를 들으러 갔다가 책의 요약된 내용을 들을 일이 있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배출가스 감소, 에너지원의 변화 외에도 기후 변화를 막을 (또 반대로 말하자면 기후 변화를 부추기는) 방법을 이렇게 광범위하게 생각해볼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놀랐던 기억이 난다. 특히 전 지구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여성 교육이나 가족계획과 같은, 우리는 쉽게 떠올리지 못했을 것들 또한 꽤 많은 양의 탄소 절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신기했었다.
그때 강의를 들으며 어떡하면 사람들이 기후 위기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생각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탄소 배출을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함께 고민하며 바꿔나갈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런 테마야말로 보드게임으로 나온다면, 재미도 의미도 가치도 있는 게임으로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막연하게 상상해 봤다.
그리고 실제로 그 게임이 나왔다. 플레이어 간의 협력으로 지구의 탄소 배출을 줄여 기후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협력 보드게임 <데이 브레이크>. 게임을 만든 작가는 이미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전염병을 막는 보드게임 <팬데믹>을 만든 전력이 있는 작가다. 미국에서 2022년부터 이 게임에 대한 펀딩이 진행되었고, 2023년 정식 발매되어 나왔다. 그리고 한글판 번역이 되어 올해 3월 우리나라에서도 이 게임을 마음껏 즐겨 볼 수 있게 됐다.
기후 위기는 한 가지 원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다. 원인도 다양하고 행동의 주체도 다양하고, 에너지 전환을 쉽게 이루어내지 못하는 저마다의 사연도 제약도 너무 많다. 사실 지금 국제 사회 또한 그래서 방관하는 부분이 있을 거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선 누군가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하는데, 아무도 쉽게 포기하는 결정은 내리지 못한다. 포기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이 굳이 내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포기하는 순간 내가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생겨나는데 그건 누가 책임져주나. 그렇게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지구의 온도는 오늘도 조금씩 올라간다. 그래서 당연히 게임도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아주 복잡하고 까다로운 룰과 번거로운 플레이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지구를 지키기 전에 복잡한 룰에 지쳐 게임을 포기하고 말면 어쩌지? 그러나 이 또한 기우였음을, 직관적인 게임판을 보는 순간부터 느낄 수 있었다.
<데이 브레이크>는 잘 만든 협력게임이다. 복잡한 지구촌의 이야기를 잘 압축하여 구조화해 놓은 느낌이랄까. 기존에 <테라포밍마스>나 <아크노바>를 해본 사람들이라면, 아니 꼭 이런 게임을 해보지 않았더라도 쉽게 룰을 이해하고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플레이 과정은 일종의 모의 토론 현장이다. 서로 다른 조건에 놓인 플레이어들이 각자 할 수 있는 서로 다른 행동 카드를 놓고 어떤 순서로, 어떤 방식으로 플레이를 했을 때 공동의 목표를 보다 수월하게 달성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만든다.
게임의 박스도 안에 들어 있는 구성물도 굳이 말하자면 예쁘다. 지구의 멸망을 향해 가는 게임이 아닌, 지구를 살리기 위한 희망의 게임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 게임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무리 애써도 플레이어들은 늘 예측하지 못한 위기 상황을 맞닥뜨리고, 그 위기는 또 예측하지 못한 거대한 자연재해를 불러와 애써 가꾸어놓은 생태계가 다시 붕괴되어 버리기도 한다. 플레이어들은 이렇게 닥쳐오는 공동의 위험을 막으면서도 자신의 지역을 지키기 위한 대책 또한 세워 나가야 한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가, 우리는 플레이하는 내내 딜레마의 상황에 맞닥뜨리고 그 안에서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다.
<데이브레이크>의 플레이 국가는 크게 미국, 유럽, 중국, 다수세계로 나뉘어 있다. 각 나라마다 처한 상황과 요구되는 플레이가 다른 것도 재밌다. 글로벌 원조가 조금 더 용이한 미국, 스스로 정화 능력을 어느 정도 갖춘 유럽, 여전히 급속도로 늘어나는 인구 문제가 제1과제인 다수세계. 어느 국가를 맡아서 하더라도 플레이가 쉽지는 않다. 생각보다 많은 탄소배출량에 기온은 빠르게 올라가고, 겨우 복원시켜 놓은 생태계는 또다시 파괴된다. 사실상 지구 멸망을 향해가는 게임 아닐까 싶던 무렵 소중한 승리를 쟁취해 냈다. 미국이 마음껏 퍼주고, 다수세계는 조금 더 뻔뻔하게 다양한 지원을 요구한 결과 처음으로 '드로다운'을 이루어 냈다. 아직까지 3인 플레이밖에 안 해봐서 중국이 끼어들 틈이 없었는데 (2인플에서는 중국과 미국 / 3인플에 미국, 유럽, 다수세계 / 4인플일 때 미국, 유럽, 중국, 다수세계가 모두 참여한다. 이 밸런스도 참 좋다고 개인적으론 생각한다) 그러면 플레이 양상이 꽤 많아 달라지겠지.
보통 협력게임을 해도 멸망하는 시나리오를 좋아하는 편인데 이번만은 감회가 좀 새롭다.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과 함께 하면 더 좋을 것 같다. 어쩌면 아이들이 더 잘 해낼지도 모르겠다. 한때 게임이 모든 범죄의 주번이라도 되는 양 푸대접 받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래선지 더 이 게임이 잘 되었으면 싶기도 하다. 지구를 살리는 보드게임이 여기 있다고, 애초에 이런 게임의 방식을 활용한 토론을 어딘가에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또 생각해 본다. 이렇게 상상하고 있으면 꼭 내가 만들어내지 못하더라도 어딘가에서 그게 나오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