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 모임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내가 보드게임 클럽을 운영하고 있는 커뮤니티는 3개월의 시즌제로 운영되는 곳이다. 시즌마다 멤버를 받고 새로운 팀과 클럽이 꾸려지기에, 그 안의 소모임인 보드게임 모임 역시 3개월 단위로 새로운 멤버들과 진행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시즌 내에 모임은 한 달에 한 번씩 총 3번 진행되며, 보통 한 번 모일 때마다 2-3시간 정도 함께 할 수 있을 터였다. 뭔가 게임의 룰을 설명하듯 상황을 나열한 것 같은데, 아무튼 배경을 정확히 알아야 전략도 짤 수 있으니까. 워낙에 보드게임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모임이 지속성 측면에서도 깊이의 측면에서도 크게 매력적이지 않겠지만, 매번 눈앞의 수를 읽는 것만으로도 벅찬 나는 일단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고 나니 앞으로의 일까지 깊게 고민해 볼 겨를이 없었다.
모임을 만들며 가장 신경 썼던 건, 이 커뮤니티의 정체성이 아무래도 직장인의 끊임없는 '공부'와 '성장'이라는 점에 있었다. 이미 운영 중인 다른 클럽은 독서 모임, 비즈니스 사례 탐구, 영어 대화 등 학구적인 느낌이 물씬 풍겨왔고, 그나마 친목류의 모임은 와인이나 위스키 등 좋은 술을 맛보며 대화를 나누는 어른스러운(?) 느낌의 것이 대부분이었다. 과연 이곳에 모여있는 직장인들이 보드게임에 흥미를 보일까? 나름의 결을 맞추겠다며 '함께 모여서 인간의 심리와 승리의 전략을 탐구'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개글을 정성스레 작성했다. 3회 차에 걸쳐 진행할 게임 시나리오도 미리 짰다. 마침 그 무렵 넷플릭스 <데블스플랜>이 공개되어 관심을 끌고 있는 것도 호재였다. 대부분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참고해 첫 모임은 마피아 게임으로 준비했다. 마피아 게임을 좋아하진 않지만 플레이어 간 서로를 알아가는 탐색전이자 친해지는 계기로 좋을 것 같았다. 이어지는 모임은 전략게임, 협력게임으로 준비했는데 사실은 내가 사놓고 한 번도 플레이하지 못한 게임을 드디어 언박싱하겠다는 속셈이 숨어있었다.
이제 와서 첫 모임을 준비하던 때를 생각해 보면 이토록 비장할 일이었나 싶지만 그때는 정말 그런 심정이었다. MBTI 대문자 I인 내가 사람을 모아 무언가를 한다는 일이 잘 상상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향적인 것과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은 늘 별개다. 하필 사람이 모여야 가능한 일을 하고 싶다는 게 아이러니긴 하지만) 그럼에도 일단 모임을 열기로 했으니 어떻게 하면 최대한 내 에너지 소모 없이 물 흐르듯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에 집중했다. 마치 협상(이리고 쓰고 협잡이라고 읽는) 보드게임 <아임더보스>에서 가장 비싼 칸의 비즈니스를 성공시켜 마침내 승리를 쟁취하고픈 보스가 된 마음으로 제발 아무런 방해 요소 없이 이 딜을 성사시키고 싶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무도 STOP 카드를 꺼내 딜을 망치지 않았고, BOSS 카드를 던지며 내 모임장 자리를 노리지도 않았다. 다만, 생각했던 것보다 딜이 성사되기 위해 필요한 에이전트들이 너무 바빴다. 클럽에 참석하겠다고 온 멤버들 모두 비행기 카드라도 들고 있었는지, 때로는 야근에 때로는 다른 약속에 밀리며 전반적으로 모임의 참석률이 높지 않았다. 크게 낙심하진 않았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개인적으로는 사람 수가 적은 것이 더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첫 번째 시즌엔 7명 정도로 시작했는데, 세 번째 시즌에서는 나 포함 3명만 고정적으로 모였다. 솔직하게는 이제 이 정도면 되었고 그냥 평소에 나가던 보드게임 카페에서 좀 더 다양하고 무거운 게임을 마음껏 하는 게 더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던 무렵이었다. 마지막 모임을 끝내고 돌아가던 날, 끝까지 자리를 지켜 준 멤버 하나가 큰 눈을 반짝이며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제발 이 모임 계속해주시면 안 돼요?”
뭐랄까, 그 눈빛에서 보드게임의 재미를 알아 버린 나 같은 내향인의 수줍은 열망을 읽고 말았다. 그리고 그다음 시즌을 다시 연 결과, 참여 멤버 10여 명에 평균 출석률도 80% 가깝게 유지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멤버들이 게임을 너무 재미있게 하고 입소문도 내면서 어쩌다보니 보드게임 모임은 이 커뮤니티 내 최고 인기 클럽 중 하나가 되었다. 지난 가을엔 커뮤니티 전체 200명에 가까운 멤버 모두와 함께 하는 보드게임 운동회까지 열었다. 그저 주변에 같이 게임할 수 있는 사람을 조금만 더 찾고 싶었던 거였는데. 이 작은 시도를 계기로 생각해보지 못했던 일이 자꾸만 벌어진다.
물론 모임에서 분명 조금 더 깊이 있는 게임을 원하는 (내가 바라왔던 '인간의 심리와 승리의 전략을 탐구'하는 ㅎㅎㅎ) 사람들의 수요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식 모임 외에도 한 번씩 번개를 열어 조금 더 시간과 고민이 필요한 게임을 함께 해보곤 한다. 실은 설 연휴인 오늘도 만나서 함께 게임을 하기로 했다. 아직 룰을 다 체크하지 못한 것이 이제야 생각난다. 오늘은 이 정도로 글을 마무리하고 새 게임할 준비를 슬슬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