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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Jul 11. 2018

17. 생애 첫 카우치 서핑

2017.4.30.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 칠레(D +83)

높거나 거칠고, 춥지 않으면 덥고. 이래저래 체력적으로 힘들었던 볼리비아를 떠나 드디어 칠레에 왔다. 한결 부드러워진 날씨, 아기자기한 거리, 여유로운 표정들, 맛있는 음식. 여기는 정말 천국 아닐까 싶은 와중에도 마음이 편치 못했으니 이유는 바로 높은 물가 때문이다. 호스텔의 도미토리 숙박을 기준으로 볼때, 페루에서는 1박에 30~35솔(약 10,500~13,000원), 볼리비아에선 40~45볼(약 7,000~8,000원) 정도가 평균이었다면 칠레에서 처음 잡은 숙소는 1박에 무려 9,000페소(약 16,000원). 물론 이곳이 그나마 가장 저렴하다는 숙소였다.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떠날 때, 모두가 부러워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편도 행 비행기표’였다. 기약 없이 떠나는 내게 언제 돌아올 거야? 물으면, 돈 떨어질 때.라고 답하곤 했다. 2년 가까이 일한 마지막 회사에서 받은 퇴직금을 몽땅 더한 예산은 처음 예상했던 3개월을 버티기엔 충분한 것 같았지만, 정작 3개월이 다되어 가는 지금 난 아직도 가야 할 곳이 많고 더 머물고 싶은 곳이 많다. 예산을 늘릴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 본격적으로 가난한 배낭여행객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칠레. 하필 남미에서 가장 저렴한 편에 속하는 볼리비아를 지나온 뒤라 이곳의 물가는 더 비싸게만 느껴진다. 마침 새로운 동행이 될, 쿠스코에서 만났던 한국인 W와 M이 나를 만나러 이곳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그들을 기다리며 어차피 일주일은 이곳에 머물러야 했고 생각 끝에 해보고 싶었지만 한 번도 도전하지 못했던 그것, 바로 카우치서핑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아타카마 마을의 풍경


낯선 사람에 대한 겁은 많이 사라진 뒤였지만 여성 여행자, 특히 동양인에 대해선 좋은 호스트도 돌변하는 경우가 있다는 주의를 많이 들었던 터라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호스트를 물색했다.  

첫 번째, 여자일 것.  

두 번째, 집이 중심가에서 멀지 않을 것.  

세 번째, 후기가 많은 사람일 것.  

그러나 조건에 맞는 호스트는 많지 않았다. 고심 끝에 겨우 2명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약 하루 만에 다행히도 그중 한 명으로부터 환영한다는 답장을 받았다. 그런데 이거 괜찮은 걸까? 일러준 주소를 찾지 못해 헤매는 나를 위해 마중을 나온 나의 호스트는 자꾸만 나를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낮고 허름한 가건물들이 늘어선 길로 나를 데려간다. 혼자서 집을 찾을 때 분명히 왔었던 곳이다. 그러나 도저히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 거 같아 다시 되돌아왔을뿐. 그곳에 그녀의 집이 있었다. 자물쇠로 굳게 닫혀있던 철문 안 마당으로 이것저것 목재와 쓰지 않는 가구가 널려 있어 마치 공사 중인 것 같던 그 집. 심지어 내가 올라타도 될 것 같은 커다란 개가 세 마리나 마당에서 돌아다니며 컹컹 짖어대는 그 집. 마당 뒤로 보이는 슬레이트 지붕 건물은 공사하는 인부들이 와서 쉬는 임시 거처일 것 같던 그 집 말이다. 


상점과 식당, 여행사가 몰려있는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그러나 이 집. 막상 들어가니 생각보다 좋다. 햇빛이 가까운 거실은 늘 밝고, 대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건 마당, 눈을 들면 저 멀리 아련하게 서있는 설산. 크진 않지만 아기자기한 거실과 주방. 깔끔하게 정리된 실내. 그리고 무엇보다 이 친구들. 통성명과 짐 정리가 얼추 끝나자 나의 호스트와 그녀의 룸메이트가 두 눈을 반짝이며 한국 영화를 몇 편 봤다고 말을 이어갔다.  

"<naufrago en la luna>를 알아?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 영화야." 

'달의 조난자'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까? 그러면 한국 제목은? 세상에. <김씨 표류기>.  

봤다. 심지어 혼자 영화관에 가서 봤다. 정말 좋아하는 영화. 그러나 당시 가까운 누구와도 취향이 맞지 않아 혼자서 봤던 영화. 그 흔치 않은 취향을 지구 반대편에서 와서 만날 줄이야. 순간 내 목소리가 커졌고 덩달아 그녀들도 신이 났다. 우리는 한참 영화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내내 서로 좋아하는 음악을, 음식을, 그림을 공유했다. 

여전히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금방 식구가 됐다. 아침에 함께 식사를 했고, 친구들이 공부를 하는 동안 나는 옆에서 밀린 일기를 썼다. 동네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돌아오는 길엔 그녀들이 일하는 카페에 놀러 가 함께 커피를 마셨다. 밤에는 동네의 다국적(?) 친구들이 음식이나 술을 가지고 집으로 놀러 오기도 했다. 멕시카나, 페루아나, 칠레나, 그리고 말 못 하는 꼬레아나가 함께 모여 별을 보고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국적은 멕시코라는 그녀는 상대적으로 물가가 비싼 이 동네에서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공부도 하고 있었다. 떨어져 있는 부모 마음이 다 그런지, 내가 머문 짧은 기간 동안 적어도 두 번은 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냐, 돈은 모으냐, 결혼은 안 할 거냐, 어쩜 지구의 반대편에서도 부모님의 걱정은 똑같고, 삶이나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고민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아타카마 사막에서의 일주일 중 이들 집에 머물렀던 기간은 3박 4일.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길었던 쿠스코의 시간만큼이나 정이 들었다. 이 마을을 떠나는 날 까지도 그녀들은 '언제든 다시 와, 기다릴게'라고 했다. 마치 어제도 그랬던 것 같은, 내일도 그럴 것만 같았던 일상들. 평범했지만 그래서 더 그리운. 또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이 생겼다. 



*카우치서핑(couchsurfing)
잠을 잘 수 있는 쇼파를 의미하는 카우치와 서핑의 합성어로 된, 여행자들을 위한 비영리 커뮤니티이다. 여행을 떠날 지역을 설정하면 그 지역에서 숙박을 제공해줄 수 있는 호스트들을 볼 수 있고, 그들에게 머물고 싶다는 요청을 보낼 수 있다. 호스트가 응답을 해서 서로 확인이 되면 정해진 기간동안 그 집에서 무료로 머물 수 있다. 
전세계의 많은 여행자들이 사용하는 커뮤니티로 이미 우리나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는데, 저렴한 숙박을 위해서만이 아닌 여행지의 새로운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다양한 문화 교류를 나눌 수 있는 장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무료이고, 참여자의 신원이 100%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항상 안전에 유의해야 한다고 한다.
사이트가입 후 이용을 할 수 있다.  https://www.couchsurf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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