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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Jul 14. 2018

18. ¡Salud! 별 빛 아래 생맥주를

2017.4.30.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 칠레(D +83)

냉면, 떡볶이, 김치. 뭐 이런 것들이야 그럴 수 있다. 해외여행을 하면서 먹고 싶은데 그러기가 쉽지 않은 것들. 그래도 김치와 떡볶이라면 한 번씩 만들어 먹기라도 했다. 그런데 이건 정말이지 의외의 변수다. 먹고 싶은데 참 쉽지가 않다. 심지어 어떻게 만들어 먹을 수도 없다. 바로 '생맥주' 말이다.

 



칠레 도착 3일째, 카우치서핑 첫째 날이었다. 그날 밤 마을 인근에서 맥주 페스티벌이 열린다고 했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알려진 카우치서핑 앱으로도 몇 명이 페스티벌에 놀러가자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의 호스트도 내가 짐을 풀던 낮부터 함께 가자고 했는데 선뜻 대답을 못했다. 9천 페소 숙박비를 아끼려고 신세를 지는 중인데 입장료만 8천 페소인 축제라니. 그러나 모두가 들떠있는 분위기, 맥주도 마시고 싶고, 같이 놀고 싶고, 어떻게 나만 홀로 집에 남아있을 수 있단 말인가. 다시없을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어이 친구들을 따라나섰다.

 

멀리서부터 번쩍번쩍 불빛에 둠칫 둠칫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결을 따라 끊임없이 들려오는 환호성 같은 것을 잠깐 뒤로하고 우리는 어둠이 내린 시내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며 거리에서 혹은 가게에서 함께 축제장으로 갈 친구들을 모았다. 이건 마치 어린 시절 종종하던 RPG 게임 속 스토리 진행을 위해 처음 보는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단서나 동료들을 찾던 그런 느낌이랄까.  

그렇게 모은 파티원(?)은 모두 다섯. 간단한 식사로 허기를 채우고 다 함께 축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게 한국말로 욕을 해보라더니, 자기네 나라의 '나쁜 말'을 가르쳐주며 웃고 떠들고 신난 아이들. 서로 뜻도 잘 모르는 그 말들을 외우겠다고 주고받는 사이 황량하기도 약간은 무서워 보일 수도 있을 큰 도로를 무사히 지나 입구에 도착했다. 비싼 입장료는 괜한 걱정. 중고로 산 입장 팔찌를 돌아가면서 사용하는 현지인 꼼수(?) 덕에 3천 페소로 해결이 됐다.  

너무 가까워진 음악 소리 때문일까, 잠시 긴장감이 넘쳤던 입장 트릭 때문일까, 아니면 벌써부터 취한 걸까, 심장이 막 두근거린다. 그러나 아직 두근거리기는 이르다는 듯 눈앞에 곧 신세계가 펼쳐졌다.  



생맥주! 생맥주!!
게다가 옆에선 라이브 공연이 한창



공터의 가장자리를 둘러싼 천막 부스엔 처음 보는 각종 맥주 브랜드가 가득. 한쪽 끝에 마련된 무대에는 라이브 공연이 한창.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니 마치 '쌈싸페'의 아타카마 버전 같달까. 여기에서 이런 축제를 즐길 줄이야.  

게다가 생맥주! 남미에서 생맥주는 진짜 마시기 힘든 술이었다. 제일 오래 머물렀던 쿠스코에서도, 생맥주는 비싼 데다 가격 대비 맛이 별로라며 추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떠나기 전날에야 큰 맘먹고 딱 한 번 마셨더랬다. 심지어 그것도 페루의 대표 맥주인 쿠스케냐가 아닌, 그냥 영국인가 어디의 외국 맥주였다. 그런데 여기선 탭에서 맥주를 바로 따라준다. 종류도 엄청나다. 친구들이 마시는 맥주를 따라 시켰다. 마치 테킬라라도 되는 듯, 생맥주에 레몬즙을 뿌리더니 흡사 고춧가루와 비슷해 보이는 매운맛의 소스 가루, 그리고 소금이 더해졌다. 짜고 시큼하고 자극적인 맛. 두 번 마시라면 고민을 했겠지만 지금은 그냥 다 맛있다. 언제 또 이런 걸 마셔보겠어. 캬~ 행복해.

 


짜고 시고 자극적이었던, 그러나 너무나 맛있었던 맥주


축제 현장엔 그녀들의 또 다른 친구들도 많이 와있었다. 함께 인사를 나누고 맥주를 나눠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춤을 췄다. 공연은 사실 그렇게 완벽하진 않았지만 모인 사람들의 흥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모두가 유쾌했고, 맥주를 마셔서 그런가 말이 잘 안 통해도 그 순간엔 모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화장실은 어디야?"  

"여기가 다 화장실이야!"

모두가 웃었고 우리는 돌아가며 페스티벌 뒤쪽 공터로 가서 주차된 자동차 사이에 숨어 볼일을 봤다. 달빛과 별빛이 너무 밝았는데 벌써 취해버린 건지 부끄럽지도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한 번 더 멈춰서 골목 옆에 숨어 볼일을 봤다.  

"이 사막에 이렇게 영역표시하고 가는 한국인은 네가 처음 일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별이 정말 예쁘다!!"

그날, 마셨던 맥주 값까지 다 합쳐서 내가 쓴 돈은 고작 5천 5백 페소. 오며 가며 만난 친구들이 사주고 맛보라고 준 맥주에, 그리고 취해서 더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넘겨주고 간 맥주에, 그리고 분위기에, 흥에 잔뜩 취해버렸다. 정말 오랜만에 시끌벅적하게, 와글와글 신나게, 거리낌 없이 하하하 웃다가 하루가 끝나버렸다.


참,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니 이건 내가 남미에서 마신 마지막 생맥주였던 것 같다. 정말 잘했구나. 뭐든 할 수 있을 때 일단 해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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