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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권의 노트와 SNS

[개짱이 다이어리] 2025.3.22의 기록

by 배짱없는 베짱이

요즘 쓰는 노트를 모아보니 5권이 나온다. 굳이 말하자면 일기장 역할을 하는 노트, 최근에 새롭게 장만한 필사노트, 얼마 전 시작된 모임에서 선물로 받은 실험노트, 그리고 가방에 늘 넣어 가지고 다니는 휴대용 노트 두 권. 하나는 아무 때나 필요할 때 쓰는 아이디어 막노트고 하나는 그림을 일상화하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마련한 드로잉노트다.

다섯 권을 나름 잘 돌아가며 쓰고 있는데 가끔은 헷갈린다. 내가 그 내용을 어디에 적었더라, 분명 여기에 정리해 둔 것 같은 데 내용이 왜 안 보이지? 하면서. 권 수를 줄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쉽지 않다. 그러고 보면 집에는 언젠가 쓰다만 노트들이 수두룩. 그 빈 공간을 어떻게 다시 채워나가기도 애매해서 그대로 쌓아놓은 지 오래다.


최근 책을 만들어보는 작업을 시작하면서 대외용으로 소개될, 말하자면 나의 작가 계정이 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SNS도 정말 관리가 안 된다. 이미 블로그가 하나 있고, 브런치도 쓰고 있고, 인스타그램은 계정 수가... 어휴 말 안 하련다. 쓰고 있는 내용도 제각각이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건지, 할 말이 없어서 모든 말을 다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일단 만화를 그려보려 만들었지만, 수채화 연습 이미지나 올리고 있던 인스타그램 계정을 작가 계정으로 바꿨다. 수채화 콘텐츠를 계속 가져갈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가 만든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는 글, 그림 계정으로 사용해보려 한다.


인스타그램 작가 계정의 예전 이름은 "개짱이 다이어리"였다. 개짱이는 '개미의 탈을 쓴 베짱이'의 줄인 말인데, 베짱이처럼 살고 싶지만 개미처럼 일하고 있는 내 신세를 한탄하며 만들었던 이름이다. 초반에 올리던 만화에는 회사에서 개미처럼 일하다가 퇴근하면 개미 탈을 벗어던지고 늘어지는 베짱이가 나온다. 개미와 베짱이는 생긴 건 비슷한데 색이 다르고 하는 짓도 성격도 정말 다르다. 사실상 월급쟁이 시절의 내 모습이다. 그 시절 베짱이는 별 일을 다해도 그게 다 하나로 수렴이 됐다. 개미가 벌어오는 돈을 펑펑 쓰고 어떻게든 새로운 일을 벌이는 모든 일이 다 베짱이의 정체성이었으니까. 그런데 개미의 탈을 벗어버린 지금, 왜일까, 베짱이가 사라졌다. 그냥 여기저기에서 중구난방으로 일을 벌이며 흩어져 있는 퍼즐 조각을 하나의 작품으로 모으지 못하는 정체불명의 곤충 한 마리가 덜덜 떨고 있는 느낌이다.




얼마 전 B 과장님을 만났다. 과장님은 내가 남미에 가기 전 회사를 다닐 때 만난 사람이다. 조직생활이 대체로 힘들었던 나는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과 좀처럼 친해질 일이 없었다. 그런 내게 과장님은 직장인의 태도를 알게 해 주었고, 퇴사 후에도 이어지는 사회생활 첫 인연이 되었고, 나보다 빨리 조직 생활을 빠져나가더니 개미를 벗어던진 베짱이에게 가끔 일을 던져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과장님은 내 주변 사람 중 객관적인 말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다. 그런 과장님이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지금까지 벌이던 그 많은 일들 중에 그나마 의미 있고 생산적인 일을 하기 시작했네"라고 말했다. 그나마 개미가 여태껏 해왔던 일과 관련이 있는 베짱이의 등장. 미약하지만 개미와 베짱이의 합체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그 중구난방의 발자취를 조금은 좁혀볼 수도 있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내 활동의 갭이 너무 크다고 덧붙였다. 그러면 브랜딩이 어렵다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서정적이고 동화 같은 글과 그림은 지금까지 내가 보여준 적 없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이긴 하다. 나는 늘 크라잉넛과 강아솔 사이에서 고민하다 크라잉넛을 고르는 사람이었으니까. 두 뮤지션의 감성이 내 안에 모두 있지만, 그리고 강아솔을 정말 좋아하지만, 결국 눈이 돌아가는 건 크라잉넛의 무대였으니까.


그럼에도 첫 책은 기왕이면 강아솔의 노래와 함께 하고 싶다. 아마 모두가 그렇게 여길 것 같은 작품이 나왔다. 하지만 과연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분위기의 책을 만들어낼 거야?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강아솔도 크라잉넛도 되고 싶다. 중구난방으로 뛰어다니는 베짱이가 되고 싶다. 하지만 강아솔이 강아솔일 수 있는 것은, 크라잉넛이 크라잉넛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처음 발을 들인 그 길에서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과장님은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에게 단 한 마디로 나를 소개해야 하는 순간이 올 거라고. 나 또한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고. 대통합을 향해 달려가보자. 다시 개미의 탈을 쓰지 않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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