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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Aug 22. 2018

29. 호스텔이라는 여행의 묘미

2017.6.9. 아순시온, 파라과이(D +123)

처음으로 제대로 된 ‘호스텔’이란 곳에서 묵었던 것은 여행 초반 멕시코의 오악사카(Oaxaca)에서였다. 한 방에 여럿이 침대를 놓고 자는 것이야 그렇다 해도, 자리를 비울 때마다 사물함에 짐을 다 넣어놓고 자물쇠를 잠가야 하는 번거로움이야 그렇다 해도, 참을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으니 그건 공용 샤워실이었다. 좁고 습기 가득찬 샤워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면 갈아입을 옷이나 수건을 제대로 걸어 둘 곳도 없었고, 바닥에는 어지러이 앞서 사용한 누군가의 머리카락 뭉치들이 돌아다녔다. 그 안에서 씻어야 했다. 씻을 곳은 그곳밖에 없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적으로 만들곤 했었다.




호스텔의 수난은 계속됐다. 오래 머물렀던 쿠스코에서는 굳이 한 침대에 같이 누워 있으려는 어떤 커플의 옆 침대를 사용해야 했던 적도 있고, 그곳에서 나와 옮긴 다른 호스텔에선 옆 방의 털 많은 총각 둘이 사방에 뿌려놓고 간 털 범벅의 화장실을 함께 사용해야 했다. 10명도 넘는 사람들과 한 방을 써야 한다거나 그중 누군가의 코고는 소리에 잠 못 이루던 기억 정도는 애교로 남았다.

큰 도시엔 한인 숙소도 꽤 있었다. 상대적으로 비싼 대신 훨씬 깨끗하고 마음이 편했다. 실내에선 따로 사용할 수 있는 실내화를 구비해놓은 곳이 대부분이었고 주방도 넓고 깨끗해서 좋았다. 짐 분실에 대한 우려도 적었는데, 조금 장기로 머물면서 마음이 해이해져 짐을 여기저기에 뿌려놓고 다닐 때도 소지품 하나 잃어버린 적이 한 번 없었다. 그러나 한인 숙소는 오래 머물러야 하거나 몸이 아팠던 경우가 아니라면 가능한 이용하지 않았다.

호스텔만 다녔던 것도 아니다. 호텔이라고 부를만한 나름 별도의 욕실이 갖춰진 1인실 혹은 2인실에 묵어본 적도 있고, 에어비앤비(Airbnb)도 종종 사용했다. 이미 익숙해진 동행인들하고만 공간을 공유하고 좀 더 편하게 늘어져 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지, 시간이 지날수록 호스텔이 좋았다. 호스텔에는 다른 곳에서 절대 경험하지 못할 무언가가 있었다. 다른 곳이었다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 말이다.


파라과이에서 머물렀던 에스따시온 센트럴 호스텔의 파티오(우리로 치면 마당 같은 것)의 한 풍경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은 짧게 머무른 데다 한 것도 별로 없어서인지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몇 가지 음식과 호스텔밖에 없다. M과 내가 묵었던 에스따시온 센트럴 호스텔(Estacion central Hostel)은 원래 가려던, 비싸지도 않고 깔끔해서 한국인들이 많이 이용한다는 호스텔에 자리가 없다는 말을 듣곤 터미널에서 급하게 찾아보고 정한 곳이었다. 심지어 주로 이용하는 오프라인 지도 앱 맵스미(Maps.Me)에 위치가 잘못 찍혀 있는 바람에 어둡고 비 오는 저녁을 한참 헤매다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머문 2박 3일의 짧은 시간, 나는 그 전까지의 어느 호스텔보다도 투숙객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호스텔 스텝으로 있는 유쾌한 친구들 리사와 실비아, 말 많은 일본인 고지로와 조용한 프랑스인 멜라니, 히피 같은 영국인 아저씨 사이먼.

 

리사와 실비아는 현지식을 먹고 싶어 하는 내게 이런저런 파라과이의 음식을 소개해주더니 내가 떠나던 날에는 빵집을 하는 실비아의 아버지가 직접 만들었다는 파라과이식 빵과 잼을 두 손 가득 선물로 쥐어줬다. 일본인 고지로는 한국말도 곧잘 했는데 과거 한국인 여자 친구를 사귄 적 있다고 했다. 긴 머리에 기타를 들고 노래를 하며 돈을 번다더니 한국 곡도 가사까지 완벽하게 불러주곤 했다. 사이먼 아저씨는 우리가 볼리바아를 지나 다시 페루를 향해 갈 거라는 말에, 그 길은 너무 힘든 길이니 아르헨티나를 통해서 가라고 어디선가 지도 책까지 들고 와서 찬찬히 설명을 해줬다. 물론 우리가 선택한 길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이유가 컸기에 아저씨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았지만.


호스텔에서 사랑방의 역할을 하는 곳이라면 대부분이 거실 아니면 식당(주방)이다. 에스따시온 센트럴 호스텔에선 거실에 있는 둥글넓적한 커다란 식탁에 모여 조식을 먹고 종종 저녁도 함께 먹었다. 각자가 사오거나 요리한 음식을 먹었지만 둘러앉아서 도란도란 그날 하루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나 TV에서 나오는 어떤 이슈에 대해 떠들기도 했다. 식사가 끝난 뒤에도 몇몇은 남아서 계속 수다를 떨었고, 피곤한 사람은 먼저 일어나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호스텔을 떠나던 날, 버스 시간은 늦은 오후였고 M은 계속 몸이 안 좋았다. 호스텔의 식구들은 버스 시간까지 천천히 쉬다가 체크아웃을 해도 괜찮다고 그러다 마음이 바뀌면 아예 하루쯤 더 머물다 가는 것은 어떠냐고 말했다. 그렇게 짧은 여정이었는데도, 그렇게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곳이었음에도, 기억 속 파라과이라는 곳이 따뜻하고 즐겁게 남아있는 것은 바로 이들 때문이 아닐까. 결국 사람이라는 것, 여행도, 어쩌면 인생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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